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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9장 - 2. 문명창시자가 잘못이 적으려면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9장 - 2. 문명창시자가 잘못이 적으려면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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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문명창시자가 잘못이 적으려면

 

 

다음에 연결되는 과기과(寡其過)’의 해석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를 단순히 어떤 잘못이나 실수, 영어로 말한다면 미스테이크(mistake)로 생각해서, 이 말을 잘못하는 빈도를 줄인다 정도로 해석하고 있는데, 고전의 맥락을 모르는 데서 오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孔子與之坐而問焉, :“夫子何爲?” 對曰:“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 使者出. 子曰:“使乎! 使乎!”
거백옥이 공자(孔子)에게 사람을 심부름 보냈다. 공자(孔子)가 그 심부름 온 사람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선생께서는(거백옥) 요즈음 뭐하고 지내시나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우리 어른께서는 늘 그 허물을 줄일려고는 애쓰시지만 썩 잘은 못하시고 계신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심부름 온 사람이 돌아가자 공자(孔子)그 사람 심부름 보내는 사람 한번 잘 고르는 구만라고 말했다.

 

거백옥(蘧伯玉)은 위나라 대부이고, 이 글에서 부자(夫子)는 거백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귀절의 사호사호(使乎使乎)’는 사람을 제대로 뽑아서 보냈다는 의미예요.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구절에도 과기과(寡其過)’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중용(中庸)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여기서 심부름 온 사람이 자기 상관인 거백옥에 대하여 감히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을 해도 그것에 아직 능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또 공자(孔子)가 이를 칭찬하는 것은, ‘과기가(寡其過)’를 적극적인 도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과기과(寡其過)’라는 것은, 미스테이크(mistake)의 빈도를 줄인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바로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실천이 되며 또 유교(儒敎)의 이상적 삶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서는 죄, ‘sin’이라는 개념이 매우 부정적(negative)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동양에서 이 ()’라고 하는 것은 군자에게 있어서 상당히 긍정적(positive)인 의미가 있으, 그것을 줄인다고 하는 문제는 왕천하(王天下)하는 자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우면서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의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말을 참고하도록 합시다. “자공이 말하기를, 군자의 허물이라는 것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고쳤을 때는 모두들 우러러 본다[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여기 일월지식(日月之食)’은 일식과 월식을 가리킵니다. 논어(論語)의 이 구절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군자에게서 이 ()’라는 것은 일식이나 월식 현상과 같이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과()를 감추려 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그걸 고쳐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를 고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군자에게서 ()’, 이 허물이라는 것은 내면적으로, 즉 자기 속에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식이나 월식과 같이 누구에게든지 다 보이는 것이며 그 허물을 줄인다는 것[寡其過]은 군자의 덕성에 있어서 도덕적 진보를 나타내는 하나의 공개적 개념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한 번 강조 하지만 동양인이 말하는 ()’라는 개념을 부정적인 맥락의 실수(negaive mistake)’ 정도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군자에게서 허물이라는 것, ()’라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가 없을 수는 없지요. ‘()’는 일식이나 월식과 같이 명명백백한 것입니다. 항상 잘못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넘어갈 때만 도덕적 진보가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 역사는 이 일식월식과 같이 명명백백한 ()’를 고치는[更之] 과정이 결여된 역사입니다. 전두환도 그렇게 명명백백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이라는 ()’를 가지고 있던 인간이었고, ‘왕천하(王天下)’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그는 자기 위()에 걸맞은 역사적 요청을 거부한 겁니다.

 

일본 사회도 명명백백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매우 나쁜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일본의 정치 행태 중에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인데, 일본 사람들은 절대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시인하지 않아요. 그놈의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더 심해서, 모든 게 흐물흐물 넘어가면 다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것이 마치 동양사회의 특색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儒敎)의 이상은 잘못된 것을 우물우물 넘겨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동양 사회를 생각하면서 유교(儒敎)란 이렇게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다라고 헛다리짚고 있으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집고 넘어갈 문제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과기과(寡其過)’의 주어가 누구이냐, 즉 그 허물을 줄일 수 있는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입니다. 주자(朱子)는 이 문장에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이고 있습니다.

 

천자가 이것[三重焉]을 잘 행하면 나라의 정치가 다르지 않고 가()는 속()이 다르지 아니하고 사람들(백성)에게서 허물이 적을 것이다[惟天子得而行之 國不異政 家不殊俗 人得寡過矣].”

 

여기서 주자(朱子)는 허물이 적게 되는[寡其過] 주인공을 인(), 즉 일반의 대중으로 보고 있는데 사실 이런 주자(朱子)의 해석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주자(朱子)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은 허물이 있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주어를 일반적인 사람으로 바꾼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서 허물이 적게 되는 주인공은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자(朱子)는 주어를 바꿔서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이 삼중언(三重焉)을 잘 하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라고 보고 있다는 말인데 내가 보기에 주자(朱子)는 이 문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죠. 과기과(寡其過)를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실천이고 잘 안되지만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매우 도덕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과기과(寡其過)의 주어는 당연히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본다면 예악(禮樂)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을 잘 하면 왕천하(王天下)하는 자에게 있어서 그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말이 이어지겠습니까? 이 문명의 3대 요소를, 포괄해서 말한다면 예악(禮樂), 즉 문명의 패러다임을 잘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말이 이어지겠죠? 다음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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