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가 아닌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저자는 개체들한테서 국가와 자본을 대신할 수 있는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타자와 마주칠 수 있는 힘과 계기가 있다고 긍정하고 싶다. 만일 개체들에게 이런 역량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개체들이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이 부정된다면, 우리는 국가와 자본을 문제 삼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개체들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역사와 변화라는 것이 증발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타자와 마주쳐서 연대를 구성할 힘이 부여된 개체, 따라서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개체인 ‘주체’의 구성은 분명코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주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왜냐 하면 주체가 연대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힘을 놓고 국가 및 자본의 논리와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런 구성하는 힘을 국가와 자본에 이양할 때, 그리고 그것들의 힘에 의존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이제 주체가 아니라 단지 어느 때이든 교환가능한 ‘매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노자』를 읽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최종적인 결단의 자리에 남겨지게 된다. ‘주체’로 살 것인가, 아니면 ‘매체’로 살 것인가? 타자와의 마주침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내면의 본질로 침잠할 것인가? 유쾌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우울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강신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태학사, 290쪽
명쾌하다. 이렇게 간단하게 핵심을 찍어서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건 그만큼 깊이 고민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선 개체성에 대해 긍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여, ‘주체=타자와의 마주침 긍정=유쾌한 삶 : 매체=내면의 본질에만 침잠함=우울한 삶’을 대비시키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뭐 개체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야 하나의 관점일 테니,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주체와 매체를 대비시키는 부분에 이르고 나면 ‘너무도 극단적인 이분법이지 않나?’하는 불만이 싹트기도 한다. 그러니 바로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게 지나친 이분법인지, 아니면 정당한 논리 전개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체에 머물려 할 때 생기는 일
어려서부터 어느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기본적으로 ‘매체’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바라는 내 모습’, ‘학교가 원하는 모습’, ‘종교적인 이상향의 모습’에 맞춰 살아가야만 하니 말이다. 나 자신이 원하는 나를 찾기보다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춰야만 한다. 내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기성의 것들에 의탁하게 된다.
그런 운명성은 계속된다. 적어도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하는 마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람마다 이 시기는 천차만별로 다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식으로 내 자신을 잃고 살아가면 자연스레 후회와 회한만 남게 된다. 자식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가 결국 “나 자신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다”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장면에서 우린 그런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의 요구에 맞춰 살면 결국은 나 자신을 지워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건 나라는 존재를 ‘언제든 어느 때든 교환가능한 존재’로 몰락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내 자신이 애초에 없었으니 상대방도 나 자신을 기억하기보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대하게 된다. 고로 더욱 말을 잘 듣는 로봇이 있다면, 바꾸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와 같이 존재성을 상실하고 매체로 남으려 하면 할수록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면에 빠져들게 된다. 그건 나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산다’고 ‘내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둘러대기 위해서다. 그쯤 되면 운명론이 등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나 자신을 버리고 억압하고 온갖 불행의 요소들을 끌어들이니 그 삶이 불행해지지 않고 어찌 배기겠는가.
주체가 되어 삶을 누비라
하지만 인생의 고비와 고난을 겪으며 ‘자신의 가치’를 찾아낸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게 되어 있다. 그런 상황을 일컬어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삶이 결코 내 맘과 같지 않다는 뼈저린 현실을 느끼게 되지만 그에 덩달아 진정 내가 원하는 삶, 진정 내가 원하는 나를 맘껏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는 누군가가 어떠한 의도에서 바랐는지도 모를 모습에 나 자신을 끼워 맞췄다면, 이젠 스스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바랐던 모습에 조금씩 나를 맞추어 가게 된다. 전자의 모습은 인위적이며 의태擬態라 칭한다면, 후자의 모습은 자연적이며 완벽한 변이라 칭할 수 있다. 여기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변화는 누군가의 의도를 져버리고 내 자신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췄더라도, 결코 완벽히 내가 무너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괜한 걱정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걱정의 태반은 기우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란 주체성을 찾아가게 되면, 이젠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내 자신의 존재감이 세워진다. 난 더 이상 어느 것으로 교환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매체’가 아니라 그 누구와 차별화되어 있으면서도 독창성이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직업이나 나이와 같은 일반적 특성으로 나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서의 나를 기억하게 된다. 그렇다, 그쯤 되면 타인이 나를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나도 타인을 만나는 게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각자가 지닌 이런 저런 생각들이 스며들고 주체로서의 존재감이 느껴질 것임으로. 그런 만남이 가능해지니 더 이상 ‘나 자신’을 고집하기 위해 내면의 본질로 침잠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그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할 때나 필요한 거니까. 하지만 여태껏 나도 변해왔고 또 변해갈 존재라면 그 무한한 흐름에 날 맡기는 것도 한결 쉬워진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주체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변이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삶이 유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나하나 살펴보니, 그 이분법이 전혀 허황된 작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핵심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 바로 그 작은 차이가 결국 이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어떠한가, 이쯤 되면 긴 생각할 필요 없이 주체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가.
주체가 된 순간부터가 시작이다
하지만 주체성만 회복했다고 해서 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늘 그렇듯이 그건 시작점에 불과할 뿐이다. 그 시작을 통해 진정 행복한 삶이란 도착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욱 고군분투해야 한다.
첫째, 국가와 자본의 마수에서 끊임없이 벗어나야만 한다. 여기엔 ‘끊임없이’라는 수식어에 주의를 요한다. 우린 순간순간 약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기성체제의 안락함이 더욱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렇게 악착같다는 얘기다. 그때 거기에 나의 모든 걸 이양할 경우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는 허사로 돌아가고 교환 가능한 ‘매체’로 원상복귀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이지 않을까. 더욱이 그런 경우에는 언제 ‘주체적 삶’을 살았냐는 듯이 ‘매체적 삶’을 수호하고 지키는 변절자가 되기도 한다.
둘째, 주체들끼리 연대하여 기성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국가와 자본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피해 다녀선 안 된다. 그 연결고리 중 약한 부분을 찾아내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치며 새로운 관계성을 맺어야 한다. 고로 저자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의도에 맞추려 노력하지 않듯, 누군가가 짝 지어놓고 틀지어놓은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 노력하는 것이다. 주체와 주체가 만드는 공동체.
이러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나는 매체에서 주체로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나’라는 개체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유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이 자리에 나왔으니 이 자리에서 그런 유쾌함의 꽃을 활짝 피워보자. 주체인 그대여, 웃어라 맘껏. 유쾌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이 세상의 중심이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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