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육의 이상론, 그러나 교사들이 생각해볼 문제
지금까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교육’ ‘만남’ ‘사랑’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 개념들 하나하나를 정리해가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아주 일리 있고 타당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당한 말이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말
진정한 전인적인 교육이 되기 위해선 당연히 대화가 우선 되어야 하며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예와 함께 인간됨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지극히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나오는 십계명처럼 너무 이상적이며 비현실적인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분명 전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가 권위적인 의식을 벗어버리고 학생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모난 부분까지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포용력으로 학생을 대해야 한다. 더불어 교육을 통해 내부에 잠재된 재능을 일깨워주어야 하며 가슴 깊이 묻혀 있는 사랑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상적인 교육관일 뿐 그렇게 하기에는 대단히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로 고등학생들의 일과를 보자. 아침 6시면 일어나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7시 20분까지 학교로 향한다. 바로 위성 방송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아침 일찍 비몽사몽간에 하루를 시작한 학생들은 오후 6시까지 학교 수업을 받고 10시까지 강제 야간 학습을 받는다. 그 이후에도 남고 싶은 아이들은 남아서 새벽 1시까지 자율 학습을 받는다. 10시에 하교한 아이들 중에 태반은 집으로 향하기보다는 학원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수능 시험의 요령을 질리도록 키워간다. 이런 팍팍한 일정에 하루하루 보내는 학생들이 있고, 또 그들을 감독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일정은 어떤가? 선생님이라고 해서 별반 다른 것은 없다. 아이들 자습을 지도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와 저녁 늦은 시간까지 같이 있어야 하며 교장, 교감의 눈치를 봐가며 하루 종일 학교에서 생활한다. 그렇기에 선생님과 학생 모두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 바로 아이들과 만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수업 시간에 있는 것이다. 그 시간에 ‘만남’과 ‘사랑’을 통해 전인적 ‘교육’을 시켜주면 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고등학교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관문 정도의 인식이 팽배해진 이상 그 시간에도 여전히 학생들은 수능과의 싸움만을 계속해 나갈 뿐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능의 요령을 알려주기에 바쁘고, 혹 수업이 빨리 끝나 사담(私談)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게 되더라도 그들을 붙잡고 인생 상담을 하는 건 서로에게 불이익이 될 뿐이기에 한 순간이라도 좀 쉬게 해주는 것이, 아니면 대학 시험을 위한 준비를 하게 해주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다. 내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가끔씩이라도 자습시간을 주는 선생님이 제일 좋았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가만히 듣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수업을 나가는 선생님이 좋았다. 이와 같이 현 고등학교가 이런 현실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상적인 교사론, 그러나 읽어보며 생각을 갈무리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고등학교만 그럴 뿐이지 중학교, 초등학교에선 충분히 전인적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중학교 또한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민족 사관학교, 전주 상산고 등)의 출현으로 좋은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입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초등학교 역시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로 아이들은 사교육이라는 소용돌이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있기에 저자의 주장이 허황된 것처럼 느껴진 것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이야기들을 통하여서 한 사람이라도 의식(맘가짐) 개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식 개조가 일어나 교사의 의식이 바뀌어서 저자가 주장한 것과 같이 만남과 사랑으로 전인적인 교육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런 조그마한 변화들이 요소요소에서 일어난다면 결국 우리나라의 악성 종양과도 같은 교육정책의 폐단도 바뀌게 될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전체적인 개혁을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식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맘으로 이 책을 펴냈던 것일 거다. 나 하나만이라도 권위적인 의식을 벗어버리고 학생에 대한 관심과 이해, 모난 부분까지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포용력으로 학생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 책을 통해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 받은 것이다. ‘나 하나쯤이야’ 라는 생각은 사회와 세상을 병들게 만들고 공동체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사회로 만든다. 하지만 ‘나 하나만이라도’ 라는 생각은 이 세상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며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인 교육을 살리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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