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정경론 - 5. 지수술경 정의자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정경론 - 5. 지수술경 정의자출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8:02
728x90
반응형

 5. 지수술경 정의자출(只須述景, 情意自出)

 

 

이어(李漁)한정우기(閑情偶寄)에서 ()을 버려두고 경()을 말하는 것은 노력을 줄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하상(賀裳)추수헌사전(皺水軒詞筌)에서 시는 함축을 귀히 여기고 천직(淺直)에서 병이 든다. 시인은 마땅히 다만 경상(景象)을 묘사할 뿐이나 정의(情意)가 절로 드러나야 한다고 하였다. 왜 경()만으로 보여주는가? 꼬집어 무언지도 모를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기란 큰 인내가 필요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물만을 묘사했는데 어찌 정의(情意)가 드러나는 법이 있는가.

 

滿空山翠滴人衣 초록의 연못에는 백조가 난다.
艸綠池塘白鳥飛 푸른 이내 허공 가득 옷을 적시고
宿霧夜棲深樹在 깊은 숲 밤을 새운 묵은 안개가
午風吹作雨霏霏 낮바람 불어오자 비를 뿌린다.

 

이진(李瑱)산거우제(山居偶題)란 작품이다. 산에 가득 떠있는 푸른 이내()에 옷이 다 젖었다. 꼭 짜면 파란 물이 들을 것만 같다. 초록의 못물 위론 백조가 난다. 시인은 파랑과 초록 물감을 화면 전체에다 온통 풀어 놓았다. 안개는 밤새 어디에 숨었다가 이렇게 몰려나온 것일까. 숲속 깊은 곳에서 밤을 지샌 묵은 안개는 날이 새고 바람이 불어가자 제 무게를 못 견뎌서 빗방울로 떨어진다. 쇄락(灑落)하다.

 

枳殼花邊掩短扉 탱자나무 울타리에 낮은 사립 닫아걸고
餉田邨婦到來遲 참을 내간 아낙네는 돌아올 줄 모르네.
蒲茵曬穀茅檐靜 멍석에 나락 쬐는 추녀밑은 조용한데
兩兩鷄孫出壞籬 병아리는 짝을 지어 울 틈새로 나온다.

 

양경우(梁慶遇)촌사(村事)란 작품이다. 길 가던 나그네는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실까 싶었겠다. 길가 집은 번듯한 담장도 없이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들여다봐도 인기척이 없다. 주인 아낙은 참을 내러 들에 갔는지 낮은 사립을 비스듬히 닫아걸었다. 처마 밑 양지녘에는 멍석을 깔고 갓 거둔 곡식을 말리려 널어놓았다. 고요하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주인 없는 빈 집 터진 울타리 사이로 병아리 떼가 뿅뿅뿅 짝을 지어 나서고 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포식을 해 볼 참이다. 한 폭의 정겨운 풍경화이다. 까치발을 하고 주인 없는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시인과, 천연덕스럽게 삐약대며 곡식을 향해 약진하는 병아리 떼의 행진이 읽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籬落依依半掩扃 반쯤 닫은 사립문에 울타리 촘촘한데
夕陽立馬問前程 석양에 말 세우고 앞길을 묻네.
翛然細雨蒼烟外 푸른 안개 밖으로는 보슬비 흩뿌리고
時有田翁叱犢行 때마침 농부는 소를 몰고 오는구나.

 

성간(成侃)도중(途中)이다. 싸리로 둘러친 울타리에 사립은 반쯤 열려 있다. 석양인지라 지친 나그네는 잠자리가 걱정이다. 앞길을 물어 마땅찮으면 여기서라도 묵어가야 할 형편이다. 문간을 나그네가 서성거려도, 안쪽에선 좀체 아무런 기별이 없다. 주인은 들일을 나가고 없는 것이다. 앞길을 묻는다고는 했지만, 정작 시인은 물어보려 해도 대꾸해 줄 사람조차 만나질 못하고 있다. 앞길을 묻는 나그네의 먼 시선에 푸른 안개 자옥한 저 들판 위로 흩뿌리는 보슬비의 모습이 잡힌다. 난감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이려! 이려!”하는 소리와 함께 농부가 소를 몰고 오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들일하던 농부도 땅거미 질 무렵 비마저 흩뿌리자 귀가를 서둘렀던 것이다. 문간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나그네, 소를 몰고 돌아오는 농부, 들판 가득 번져가는 푸른 안개,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 아름다운 광경이다.

 

東峯雲霧掩朝暉 동쪽 뫼에 구름 안개 아침 햇살 가리우니
深樹棲禽晩不飛 숲 깊이 깃든 새는 늦도록 날지 않네.
古屋苔生門獨閉 이끼 낀 낡은 집은 빗장이 질려 있고
滿庭淸露濕薔薇 맑은 이슬 뜰에 가득 장미를 적시었다.

 

최경창(崔慶昌)낙봉인가(駱峰人家)이다. 자옥한 안개가 아침 햇살을 가리고 보니, 숲속 깊은 그늘 보금자리에 깃든 새들은 해가 벌써 뜬 것도 알지 못했다. 숲은 여태도 깊은 적막 속에 잠겨 있다. 적막 속에 잠긴 것은 숲만이 아니다. 푸른 이끼 오른 고옥의 문도 굳게 잠겨 있다. 울 너머 보이는 뜨락에는 함초롬 이슬을 머금고 장미가 피었다. 새들도 날지 않는 안개 낀 아침, 그와 같이 주인도 잠에서 안 깬 걸까? 대문에 이끼가 돋았다 했으니 혹 주인을 잃은 빈집이란 말인가. 곱고도 쓸쓸한 정물이다.

 

祭罷原頭日已斜 제사 마친 들녘에 해가 기울고
紙錢飜處有啼鴉 지전 태워 뒤적이자 까마귀 우네.
山谿寂寞人歸去 적막한 산골짝에 사람은 가고
雨打棠梨一樹花 팥배나무 꽃잎 위로 비가 치누나

 

권필(權韠)한식(寒食)이다. 해 저문 들녘, 한식 제사를 마친 걸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전을 사르니, 갈가마귀는 벌써부터 제사 음식을 탐하여 주변을 서성거린다. 이윽고 모두들 그렇게 돌아가 버리고, 무덤들만 남아 한층 적막해진 산골짝, 봄비는 무심히 피어난 팥배나무 꽃잎을 자꾸만 아프게 때린다. 떨어질 것만 같다. 인생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이냐. 한 세상 살다가 이렇게 떠나는 것이 가녀린 꽃잎이 빗줄기에 맞아 진흙 속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모든 것 덧없다.

 

시인이 경()만을 말하고 있어도 그 가운데는 이미 정()이 녹아들어 있다.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여러 대상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선택하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들어 있다. 그러기에 시에서 시인이 선택한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게 된다.

 

 

 

 

인용

목차

1. 가장자리가 없다

2. 정수경생 촉경생정(情隨景生, 觸景生情)

3. 이정입경 경종정출(移情入景, 景從情出)

4. 정경교융 물아위일(情景交融, 物我爲一)

5. 지수술경 정의자출(只須述景, 情意自出)

6. 즉정견경 정의핍진(卽情見景, 情意逼眞)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