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경론(情景論)
1. 가장자리가 없다
山沓水迎 樹雜雲合 | 산은 첩첩 물은 감돌고 나무들 섞여 있고 구름은 합해지네. |
目旣往還 心亦吐納 | 눈길이 갔다가 돌아오면은 마음도 따라서 움직인다네. |
春日遲遲 秋風颯颯 | 봄날 해는 느릿느릿 가을바람 스산해라. |
情往似贈 興來如答 | 정을 줌은 건네듯이 흥이 읾은 답하는 듯. |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 「물색(物色)」의 한 절이다. 산첩첩(山疊疊) 수중중(水重重), 강산은 고운데 제각금의 나무들을 구름이 감싸 안는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물인가. 저 나무는 무슨 나무며, 어디까지가 구름인가. 그저 눈앞의 경물이건만 눈길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어느새 마음에는 느낌이 자리 잡는다. 사실 하루의 물리적 시간이야 봄가을이 다를 바 없고, 부는 바람 또한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봄날의 해는 느릿느릿 좀체 흐르지를 않고, 가을바람은 공연히 뼈에 저미듯 스산한 마음을 일으킨다.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주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도 하듯 흥을 불러일으킨다. 눈앞의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에 들어오면서 어느 순간 정(情)으로 착색된다. 숲과 구름이 한데 합쳐지듯 경(景)과 정(情)은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일찍이 명(明)의 사진(謝榛)은 『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景)은 시의 매개이고, 정(情)은 시의 배아(胚芽)이니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 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元氣)가 혼성(渾成)하니 그 넓음이 가이 없다
무심히 경(景)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情)이 일어나매 경(景)은 정(情)의 매개가 된다. 가슴에 자욱한 정(情)을 품고 경(景)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도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드니, 정(情)은 경(景)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胚芽)가 된다.
정(情)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경(景)만 가지고 시가 되는 법도 없다. 그래서 청(淸)의 왕부지(王夫之)는 「석당영일서론(夕堂永日緖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시(詩)에 뛰어난 자는 합함이 묘하여 가장자리가 없다. 빼어난 시는 정(情) 가운데 경(景)이 있고, 경(景) 가운데 정(情)이 있다
이렇게 ‘묘합무은(妙合無垠)’의 설을 주창하였다. 선녀의 옷은 꿰맨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정과 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어디까지가 경이고 어디부터가 정인지 그 가장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정을 말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경을 묘사하고 있고, 경을 그려 보이는가 싶어 보면 다시금 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명(明) 나라 도목(都穆)은 『남호시화(南濠詩話)』에서 “시를 지음에는 반드시 정(情)이 경(景)과 만나고, 경(景)은 정(情)과 합해져야만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고 하고, 두 사례를 들었다.
芳草伴人還易老 | 방초는 사람마냥 다시금 쉬 늙고 |
落花隨水亦東流 | 지는 꽃 강물 따라 동으로 흘러간다. |
위의 시는 정(情)이 경(景)과 만나 하나가 된 예이고,
雨中黃葉樹 燈下白頭人 | 빗속에 누렇게 잎 시든 나무 등불 아래 하얗게 머리 센 사람. |
위의 시는 경(景)이 정(情)과 합하여 하나가 된 예라 하였다.
시든 풀은 탄로(歎老)를 부추기고, 덧없이 져 강물 위로 떠가는 꽃은 세월의 무상(無常)을 일깨운다. 경물과 마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경물과 마주하여 정(情)이 촉발된 것이다. 추적추적 가을비는 하염없는데, 마당엔 누렇게 시든 잎을 매달고 나무가 서 있다. 내일 아침이면 가지의 잎은 모두 떨어지고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화려하던 인생의 잎새들도 이제는 시들어 떨어지고 그 아래로 밤새 등불만 가물거릴 뿐이다. 삶의 얼룩을 지우지 못한 채 또 근심 깊은 가을밤은 깊어간다. 본시 이는 경물일 뿐인데, 시인의 정이 뭉클 묻어나 가슴을 저민다.
정(情)과 경(景)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미묘한 줄다리기는 시 감상의 즐거움이다.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하지만 읽는 이는 뭉뚱그려 풀어놓은 경물 안에 감춰진 시인의 정의(情意)를 자꾸 들추어낸다. 한데 합쳐졌던 정(情)과 경(景)은 독자의 의경 속에서 어느 순간 분리되면서 새로운 미감을 불러일으킨다. 정(情)과 경(景)이 만나 이루는 조합에는 여러 경우가 있다. 경(景)을 보고 정(情)을 일으키는 ‘정수경생(情隨景生), 촉경생정(觸景生情)’의 방식과, 정(情)을 머금어 경(景)에 투사하는 이른바 ‘이정입경(移情入景), 경종정출(景從情出)’의 방식, 둘 사이의 선후를 구분할 수 없는 ‘정경교융(情景交融), 물아위일(物我爲一)’의 경우와, 경(景)만을 묘사하면서도 글 속에 절로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지수술경(只須述景), 정의자출(情意自出)’의 방식, 또 정(情)만을 말하여 경(景)을 보이지 않았으나 곡진함을 다한 ‘즉정견경(卽情見景), 정의핍진(情意逼眞)’의 방식이 있다. 이제 이러한 도식에 따라 해당 작품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정수경생 촉경생정 (情隨景生 觸景生情) |
경치와 사물을 보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 |
이정입경 경종정출 (移情入景 景從情出) |
감정을 경치와 사물에 투사하는 것. |
정경교융 물아위일 (情景交融 物我爲一) |
감정과 경치ㆍ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 |
지수술경 정의자출 (只須述景 情意自出) |
경치와 사물만을 묘사했는데 절로 감정이 드러난 것. |
즉정견경 정의핍진 (卽情見景 情意逼眞) |
감정만을 말해 경치와 사물은 없으나 핍진해진 것. |
▲ 이인문, 「초옥독서도(草屋讀書圖)」, 18세기, 31X26cm, 개인 소장
봄이 오는 숲속 초옥에 주인은 책을 읽고, 숲 저편 마을에서 동자를 앞세워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건너오는 벗이 있다.
2. 정수경생 촉경생정(情隨景生, 觸景生情)
기다리는 그대 오지 않는 봄날에
양재(楊載)는 『시법가수(詩法家數)』에서 “경(景)을 묘사함은 경(景) 가운데 뜻을 머금고, 일 가운데 경(景)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밀하고 청담(淸淡)해야지, 진부하거나 교묘함을 꺼린다. 뜻을 묘사함은 뜻 가운데 경(景)을 담고, 의론함을 밝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비경우(費經虞)는 『아론(雅論)』에서 “시는 정(情)을 일으킴을 귀히 여기나, 편편마다 정(情)을 마구 늘어놓으면 마침내 방탄(放誕)하게 된다. 시는 경(景)이 핍진함을 귀히 여기나, 작품마다 경(景)만을 펼쳐 놓으면 문득 조잡하고 천박해진다”고 했다.
岸有垂楊山有花 | 산에는 꽃 피고 언덕엔 수양버들 |
離懷悄悄獨長嗟 | 이별의 정 안타까워 홀로 한숨 내쉰다. |
强扶藜杖出門望 | 지팡이 굳이 짚고 문 나서 봐도 |
之子不來春日斜 | 그대는 오지 않고 봄날 저문다. |
송희갑(宋希甲)의 「춘일대인(春日待人)」이다. 봄이 왔다. 언덕 수양버들엔 파르라니 물이 오르고, 산에는 붉게 꽃이 피었다. 봄이 왔구나. 경물을 바라보던 시인은 물오른 버들가지와 붉게 핀 꽃을 보곤 먼 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사물에 정이 접촉하는 순간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움이 먼저였을까, 꽃을 보는 설레임이 먼저였을까? 꼬집어 말할 수 없다. 봄을 앓아누웠던 몸을 추스려 대문께로 나선다. 누구를 기다리는가. 딱히 누구랄 것도 없는 막막한 기다림이다. 그 심정 아랑곳 않고 봄날의 하루해는 뉘엿 기울고 있다. 그리움처럼 그림자가 길어진다.
위 시를 지은 송희갑(宋希甲)은 일찍이 권필(權韠)의 명성을 사모하여 강화까지 찾아가 10년을 기약하고 시공부를 시작했었다. 뒤에 스승이 전염병에 걸려 수십 일을 사경을 헤매일 때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다. 땔나무와 집안일도 그가 도맡아 했다. 충직한 그를 권필도 각별히 아꼈다.
권필이 한 번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천하를 봄이 넓지 못하면 시가 또한 국한되는 바가 된다. 나는 이미 할 수 없어 한스럽지만, 너의 근골(筋骨)로는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다. 다만 압록강 북쪽은 관문의 방비가 매우 엄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어두운 길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물 있는 곳을 만나거든 수영을 하여 몰래 건넌 뒤라야 도달할 수 있다. 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또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 행만리로(行萬里路)의 강산지조(江山之助)가 있어야만 비로소 시가 얽매임 없이 통쾌해진다. 시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라면 불법월경도 마다할 것 없다고 스승은 제자를 부추기고, 순진한 제자는 좋은 시를 쓸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에 허구한 날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히다가, 마침내 바다의 짠 기운에 기혈이 삭아 조요(早夭)하고 말았다. 송시열(宋時烈)의 「여남운경(與南雲卿)」이란 편지에 보이는 사연이다. 그깟 시가 무어라고 불법월경도 마다 않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애를 썼더란 말인가.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딱한 노릇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토록 도탑던 사제(師弟)의 정과 시를 향한 맹목적인 열의로 끈끈하던 그제가 그리운 오늘이다.
옛날 그곳에 오니 우울해지네
危磴臨江高復低 | 강가 비탈 가파라 높고 낮은데 |
行人過盡水禽啼 | 행인이 가고나자 물새가 우네. |
世間憂樂何時了 | 세간의 근심 슬픔 언제 다하리 |
匹馬重來意自迷 | 필마로 다시 오매 마음 심란타. |
이현(李袨)의 「과강천구장(過江川舊莊)」이란 작품이다. 가파르다 싶으면 문득 낮아지는 산비탈, 낯선 침입자가 다 지난 뒤에야 물새는 비로소 다시 운다. 이 모양을 보다가 시인은 갑자기 세간(世間)의 우락(憂樂)을 떠올렸다. 근심과 즐거움이라 했지만 낙(樂)은 그저 갖다 붙인 말일 뿐이다. 세상살이 지고 가는 근심이란 가파른가 싶으면 평탄해지는 비탈길과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 옆으로 시간의 강물은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예기치 않게 찾아드는 근심 걱정 앞에 조바심 하기는 예고 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움츠리는 물새와 방불치 아니한가. 1.2구의 경은 사실 무심히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일 뿐이었는데, 시인은 여기에 3.4구의 정을 삼투함으로써 절묘한 의경을 창출하였다. 다시 제목을 환기하면 옛 놀던 자취는 그대로인데 있어야 할 사람은 없고 나 홀로 쓸쓸하다. 경(景)이 먼저고 정(情)은 나중이다.
울적할 때 환하게 떠오르는 해
舟中晨起坐 相對是靑燈 | 새벽녘 배 위에 일어나서는 푸른 등불 마주 보며 앉아 있자니, |
鷄犬知村近 星河驗水澄 | 닭 울음에 개 짖어 마을 가깝고 은하수 비취니 물이 맑구나. |
隨身唯老病 屈指少親朋 | 늙음과 질병만이 이 몸 따르고 손꼽아도 친구는 몇이 안 되네. |
世事又撩我 東方紅日昇 | 세상 일로 마음은 심란만 한데 동녘에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
홍귀달(洪貴達)의 「광진주중조기(廣津舟中早起)」란 작품이다. 떠도는 것이 인생살이라지만 그는 무슨 일로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웠을까. 축축하고 서늘한 서리 새벽에 일어나니 밤은 아직도 깊었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질까 싶어 등불과 마주 앉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가물거리는 등불을 보다가 시인은 허망한 느낌이 일었다. 2구의 ‘상대(相對)’란 말에 그 뼈저린 허전함을 담았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 덩달아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인가가 멀지 않음을 알겠다. 강물엔 은하수가 그대로 떠 있다. 참 맑은 물이다. 마을을 가까이 두고도 그는 배를 그리로 댈 생각 없이 새벽 맑은 강에 어린 별빛과 푸르스름한 등불만을 바라보며 오두마니 앉아 있다. 허균(許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처음 네 구를 두고 ‘추경심교(秋景甚巧)’ 즉 가을 경치 묘사가 기가 막히다는 평어(評語)를 남겼다.
가을 새벽의 해맑은 경(景)은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정(情)을 일으켰다. 돌아보면 이룬 것 없는 평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늙고 병든 고단한 몸뚱이뿐이다. 손꼽아 헤일 만한 벗도 없다. 가뜩이나 힘겨운데 세상일은 더하여 마음을 심란케 한다. 이때 동편 저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실망하지 말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위로하는 것 같다. 분명치 않게 몽롱하던 것들이 새벽 첫 빛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첫 4구를 경(景)으로 시상을 연 뒤, 다음 세 구로 정(情)을 받쳤다. 그리고는 끝구에서 다시 경(景)을 끌어와 의경을 반전하였으니, 앞뒤의 경으로 정을 감싸 안았다.
가녀린 꽃잎에 가닿은 마음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 간 밤 비 맞고서 꽃을 피우곤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누나. |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 슬프다 한해 봄날의 일이 비바람 가운데서 오고 가노매. |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이다. 1구와 2구는 다섯 글자가 정연한 대구를 이루었다. 꽃을 피운 것은 ‘작야우(昨夜雨)’이고, 꽃을 떨군 것은 ‘금조풍(今朝風)’이다. 간밤 비 맞고 핀 꽃이 아침 바람에 진흙탕 속에 잎을 떨구었으니, 겨우내 눈을 아끼고 망울을 부퍼 마침내 꽃피운 보람은 당초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시인은 이를 ‘가련(可憐)’이란 한 마디로 압축했고, 한 해 봄 일이 비바람 가운데 오간다 하여, 우리네 인생살이도 풍파 속에 덧없음을 보였다. 아름다운 자태를 선뵐 겨를도 없이, 가꾼 보람 허망하게 떨어진 꽃잎들이 세상에 어디 한 둘이겠는가? 바람은 언제나 딴 데서 불어오고 그 불공(不公)을 탓하기엔 꽃잎의 힘은 너무 가녀리다. 떨어진 꽃잎에 정(情)이 촉발되어 ‘일춘사(一春事)’가 ‘일생사(一生事)’로 확장되었다.
어둠이 찾아올 때 간절한 것
落葉鳴沙逕 寒流走亂山 | 낙엽이 답쌓인 명사(鳴沙) 길에서 찬 물은 어지런 산 달려가누나. |
獨行愁日暮 僧磬白雲間 | 나그넨 날 저묾이 근심겨운데 구름 저편 스님은 경쇠를 친다. |
백광훈(白光勳)의 「과보림사(過寶林寺)」이다. 가을의 찬 시내는 비죽 솟은 산들이 어지럽다고 쏜살같이 내달려 달아난다. 낙엽이 쌓인 모래사장은 모래의 사각이는 소리에 낙엽 밟는 소리를 곁들였다. 낙목귀근(落木歸根),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찾아 떠나가는데, 허허로운 가을 산길에 강물은 또 무엇이 바빠 저리 서두는가. 갈 데 없이 달려가는 시내를 바라보다 문득 나그네의 마음도 부산해진다. 하루해가 저무니 길 가는 나그네는 짙어오는 땅거미가 근심에 겹다. 오늘은 어디서 묵어갈 것인가. 반본환원(返本還元), 잎이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듯 피곤한 몸을 길게 누일 안식의 자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때다. 두서없는 근심 속에 댕그렁 댕그렁 흰 구름 사이로 은은한 풍경소리를 들은 것은. 무얼 걱정하느냐고, 여기 절이 있다고, 와서 쉬어 가라고.
3. 이정입경 경종정출(移情入景, 景從情出)
술 취해 수창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담는 방식
심웅(沈雄)은 『고금사화(古今詞話)』에서 “정(情)은 경(景) 때문에 그윽해지니 정(情)이 두드러지면 의경이 노출되고, 경(景)은 정(情)으로 인해 아름다운데 경(景)만 있게 되면 엉기어 막히고 만다”고 하였고, 왕창령(王昌齡)은 『시격(詩格)』에서 “시가 뜻만 말해 버린다면 맑지 않아 맛이 없고, 경(景)만 말해도 또한 맛이 없다. 일이란 모름지기 경(景)과 의(意)가 서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좋다.”고 하였다.
昨日南山飮 君詩醉未酬 | 간밤 남산서 술 마시다가 술 취해 그대 시에 화답 못했네. |
覺來花在手 蛺蝶伴人愁 | 깨고 보니 손에는 꽃이 있구나 나비만이 나마냥 근심 겹구나. |
다시 백광훈(白光勳)의 시 「기량천유(寄梁天維)」 한 수를 더 보기로 하자. 술을 깨고 보니 간밤 늦도록 술 마신 생각, 옆에는 벗의 시가 덩그라니 놓여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술을 못 이겨 드러누운 나를 두고 벗은 그만 살그머니 돌아갔구나. 벗의 시에 수창(酬唱)치도 못하고 취해 누운 미안한 마음으로 시상을 먼저 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손에는 꽃가지가 쥐어 있다. 어찌된 걸까. 벗이 내 손에 쥐어주고 간 것일까. 꺾인 꽃가지의 향기를 탐해 나비는 내 손 주위를 어정거려 보지만 뿌리를 떠난 꽃은 벌써 시들하다. 섭섭한 친구, 그렇게 가버리기는. 나비가 시든 꽃잎에 묻어가는 봄을 서운해 하듯, 지난밤의 흐뭇함이 못내 아쉽다. 덜 깬 술을 도리질하며 벗이 남긴 시에 차운하여 돌아간 벗에게 부친다. 미안하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본다. 먼저 정(情)을 드러낸 뒤, 시든 꽃 주위를 서성이는 나비에게 그 정을 투사하여 물아(物我)가 하나 되게 착색하였다.
한가로운 늘그막 일상을 담다
爭名爭利意何如 | 명예 이익 다퉈보니 어떠하던가 |
投老山林計未疎 | 늙어 산림(山林) 깃드니 뜻 성글지 않도다. |
雀噪荒堦人斷絶 | 거친 뜰 참새 짖고 사람은 없어 |
竹窓斜日臥看書 | 대창 빗긴 해에 누워 책을 보노라. |
이민성(李民宬)의 「재거즉사(齋居卽事)」이다. 명리(名利)를 다투는 싸움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늙은 몸을 산림에 투탁하니 이 흡족치 아니한가. 1.2구를 정으로 먼저 열었다. 종일 가도 사람의 기척이 없고 보니 참새는 섬돌까지 와서 짹짹대며 한바탕 운동회를 열었다. 죽창(竹窓)에 해가 빗기니 또 하루해가 간다. 날이 가건 달이 가건 주인은 누워 책을 본다. 기약을 두지 않은 독서(讀書)이니 그저 ‘간서(看書)’라 했다.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 펼쳐 있으니까 본다는 뜻이다. 속세의 아웅다웅하던 삶이란 인적 끊긴 마당에서 찧고 까부는 참새떼와 무에 다른가. 명리(名利)를 향한 마음도 죽창(竹窓)에 빗겨드는 서양(斜陽)인양 시들하다.
비 내릴 때의 연잎에 빗대 인간의 욕망을 얘기하다
貯椒八百斛 千載笑其愚 | 팔백 곡 후추를 쌓아 두다니 어리석음 천년 두고 비웃는 도다. |
如何碧玉斗 竟日量明珠 | 어이하여 벽옥으로 됫박을 삼아 종일토록 명주 구슬 되고 또 되나. |
최해(崔瀣)의 「우하(雨荷)」이다. 당나라 때 원재(元載)는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아 축재하였다. 죽은 뒤 창고를 뒤져 보니 후추가 팔백 곡에 종유(鐘乳)가 오백 량이나 나왔으므로 나라에서 이를 몰수하였다. 얼마나 살겠다고 후추를 팔백 곡이나 쌓아 두었더란 말인가? 하기야 이즈음 나라꼴이 멀리 당나라 때를 탓할 겨를도 없지만 말이다.
처음 1.2구에서 원재(元載)의 고사를 엉뚱하게 들이민 것은 3ㆍ4구를 이끌기 위해서이다. 그 원재를 능가하는 탐욕이 지금 시인의 마당에 있는 것이다. 벽옥으로 만든 됫박으로 하루 종일 명주(明珠)를 채웠다간 들이붓고 채웠다간 들이붓기를 계속하는 탐욕. ‘벽옥두(碧玉斗)’는 다름 아닌 푸른 연잎이다. 무수한 빗방울이 맑은 구슬로 되어 넓고 푸른 연잎 가운데로 덱데구르 굴러 떨어진다. 한참을 모아 묵직해지면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이 기우뚱 연못 위로 말구슬을 쏟아 붓는다. 구슬을 되는 됫박은 하나 둘이 아니다. 수면 위로 나온 연잎마다 서로 뒤질세라 됫박질이 한창이다. 종일 비는 내리고 이제 연못은 그렇게 주워 담은 구슬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천공(天公)의 탐욕은 비가 그치기 전에는 좀체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원재가 무색한 아름다운 탐욕이 아닌가.
명주(明珠) 사만곡(四萬斛)을 연잎에 다 받아서
담는 듯 되는 듯 어디로 보내는다
헌사한 물방울란 어위 계워 하는다
위는 정철(鄭澈)의 시조다. 그는 분명히 최해(崔瀣)의 위 시를 보았을 것이다.
동화 같은 겨울밤의 풍경
天寒宿古店 歸客夜心孤 | 찬 날씨에 해묵은 주막에 드니 나그네 밤 마음 외로웁구나. |
滅燭窓明雪 燃茶枕近爐 | 불 꺼도 영창엔 눈빛이 밝고 베갯머리 화로에선 차가 끓는다. |
深更知櫪馬 細事聞鄕奴 | 마구간 말소리에 밤 깊음 알고 이런 저런 일들은 향노(鄕奴)게 듣네. |
月落鷄鳴後 悠悠又上途 | 달 지고 첫닭이 소리쳐 운 뒤 다시금 유유히 길에 오른다. |
신광수(申光洙)의 「숙미륵당(宿彌勒堂)」이란 작품이다. 북풍한설(北風寒雪)과 함께 한 하루 노정을 마치고 저물녘 꽁꽁 언 몸으로 옛 주막을 찾아 들었다. 이윽고 밤이 오고, 허기를 채운 뒤 여관방에 앉았자니 을씨년스런 마음 가눌 길 없다. 외롭다는 느낌이 절절하게 밀려든다. 잠을 청하려 등불을 끈다. 그러나 외로움은 꺼진 등불과 함께 사위어지지 않고, 창밖에 달빛 받아 환한 눈빛으로 도로 환해진다. 윗목 화로의 주전자에선 그리움처럼 모락모락 김이 솟고. 발갛게 불씨를 간직한 방안의 화로, 하얗게 비치는 창밖의 눈빛, 자리에 누워서도 그는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마구간의 말도 연신 발을 구른다. 녀석은 지금 추운 것이다. 배고프니 여물을 더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게다. 그는 아예 잠 잘 일을 접어두고 향노(鄕奴)를 불러다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세상일이야 언제나 그렇지. 두런두런 거리는 중에 새벽달이 지고 이웃 닭은 아침을 운다. 안장을 조여매고 다시 길을 떠난다. 여명은 아직도 트지 않았다. 처음 1ㆍ2구의 정(情)이 독한 고독의 그림자를 이어지는 경(景) 속에 배어들게 하여, 동화 같은 겨울밤을 애잔하게 물들였다.
4. 정경교융 물아위일(情景交融, 物我爲一)
마음을 드러내려할 땐 오히려 감춘다
육시옹(陸時雍)은 『시경총론(詩鏡總論)』에서 “정(情)을 잘 말하는 자는 삼키고 토해냄이 깊은 듯 얕아 드러날 듯 다시금 감추어져 문득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고, 경(景)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끊어버리고 약간의 보탬만을 더하였는데도 참 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또한 흘러넘친다”고 했다. ‘욕로환장(欲露還藏)’, 즉 말할 듯 침묵하는 데서 정(情)의 맛은 더 깊어지고, ‘절거형용(絶去形容)’ 곧 시시콜콜히 묘사함을 거부하는 데서 경(景)의 상(相)은 한결 살아난다. 사실 서로 녹아 들어간 정(情)과 경(景)의 경계를 시 속에서 구분해내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박은(朴誾)만큼 역대 시화에서 자주 거론되는 시인도 없다. 중종조의 시인이었던 그는 18세기 들어 다시 각광을 받았다. 김창협(金昌協) 뿐 아니라 정조(正祖)도 박은(朴誾)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서 절창으로 일컬어진 몇 연을 살펴보자.
春陰欲雨鳥相語 | 봄 그늘 찌푸려도 새들은 조잘대고 |
老樹無情風自哀 |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만 서글프다. |
「복령사(福靈寺)」의 5.6구이다. 봄 그늘은 잔뜩 찌푸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은데, 새들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조잘댄다. 혹 비가 오려니까 새들이 불안해서 그런가 싶다가도 6구를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겠다. 풍상을 겪어 늙은 나무는 무표정하게 그대로 서 있는데, 그 무정(無情)이 서글프다고 슬퍼하는 것은 엉뚱하게 바람이라는 것이다. 찌푸린 봄 그늘과 조잘대는 새, 무정한 늙은 나무와 유정한 바람, 대구의 짜임새에 미묘한 긴장이 있다. 정작 주눅이 들어야 할 새들은 신나 있고, 담담해야 할 바람이 슬프다는 것이다. 바람이야 슬프고 말고 할 것이 없으니, 이를 슬프게 듣는 것은 시인일 밖에. 시인의 정이 경에 녹아들어 가장자리를 찾을 수 없다.
폭포와 구름에 반영된 흥망의 울분
怒瀑自成空外響 | 성난 폭포 제절로 허공 밖을 울리고 |
愁雲欲結日邊陰 | 수심 겨운 구름 엉겨 해 주변 그늘지네. |
「유역암(遊瀝巖)」의 5.6구이다. 폭포와 구름을 성나고 수심에 겨운 것으로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주관 감정이다. 분노를 머금은 폭포는 허공 밖으로 소리를 꽝꽝 울려댄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고함을 지르는 것만 같다. 구름의 근심은 밝은 태양마저도 삼킬 듯 음산한 기운으로 맺혀 있다. 구름이야 모였다 흩어지면 그뿐이니 만고(萬古)의 태양은 언제나 중천에서 저리 환히 빛난다. 전체 시가 고려의 옛 터를 찾던 나그네가 흥망의 감회를 이기지 못해 내뱉은 탄식이고 보면, 폭포의 분노와 구름의 근심을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주객이 녹아들어 정경(情景)을 분리할 수 없다.
고요한 밤의 한적한 풍경
枕上得詩吟不輟 | 베게 베고 시를 얻어 계속 읊조리자니 |
羸驂伏櫪更長鳴 | 마굿간의 마른 말도 더욱 길게 우는구나. |
夜深纖月初生影 | 밤 깊어 초승달은 그림자를 만들고 |
山靜寒松自作聲 | 고요한 산 찬 솔도 절로 소릴 내었다. |
「야와송시유감(夜臥誦詩有感)」의 첫 네 구이다. 베게를 베고 누워 이전 지은 시를 펼쳐 들고 읊조려 본다. 청을 돋워 읽다 보니 소리는 점점 낭낭해지고, 그 소리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마굿간에 엎드려 있던 파리하게 마른 말도 힝힝대며 화답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녀린 초승달도 그 여린 빛으로 마당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고요하던 산의 찬 솔조차도 파도소리를 내며 시를 읽는 내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교향악의 합주처럼 완벽한 하모니가 아닌가. 자! 여기서 어디까지가 정(情)이고, 어디까지가 경(景)인가. 무엇이 물(物)이고, 무엇이 아(我)인가.
한적한 산책에 스며든 자연
有客淸平寺 春山任意遊 | 청평사 찾아든 길손이 있어 봄 산을 제멋대로 노니는도다. |
鳥啼孤塔靜 花落小溪流 | 외론 탑 고요한데 새는 우짖고 흐르는 작은 시내 꽃잎이 지네. |
佳菜知時秀 香菌過雨柔 | 산나물 때를 알아 우쩍 자라고 이끼는 비온 뒤라 보드랍구나. |
行吟入仙洞 消我百年憂 | 신선의 골짝에서 거닐며 읊어 백년 인생 한 시름을 풀어보리라. |
김시습(金時習)의 작품이다. 첫 구의 두 자를 따서 제목을 「유객(有客)」이라 하였으니 넓은 의미의 무제시(無題詩)인 셈이다. 지금은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절이지만, 예전엔 구비구비 호젓한 산길을 걸어 들어갔다. 고려 때 선비 이자현(李資玄)이 은거해 더욱 이름 높은 절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이리저리 봄산을 배회하는 나그네의 마음은 그런대로 한적의 여유가 있다.
지는 꽃과 우는 새, 푸른 봄나물, 비에 씻겨 한결 보드라운 이끼, 모든 것이 한갓져서 그 품이 더욱 넉넉한 봄 산이다. 나그네의 자재로움이 이미 봄 산의 풍요를 품어 안았고, 봄 산 또한 따뜻하게 시인을 감싸 안는다. 외로운 탑 둘레서 우짖는 새도 쓸쓸한 시인에게 봄날의 서정이나 막막한 외로움을 부추기지 않는다. 그저 거나한 흥취를 돋워줄 뿐이다. 봄이 다 가도록 보아주는 사람도 없이 흐르는 시내 위로 떨어져 흘러가는 꽃잎을 바라보는 안타까움도 없다. 도화류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하니 어주자(漁舟者)가 이 위에 무릉(武陵)이 있는가 싶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7구의 ‘선동(仙洞)’이 이를 말해준다. 선동(仙洞)에 들고 보니, 속세에서 지녀온 백년우(百年憂) 또한 읊조리며 숲속을 거니는 사이에 이미 찾을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바라보이는 경물이되 정의(情意)와 어우러져 서로 자기편으로 당기고 이끌릴 뿐, 어느 것이 먼저고 나중인지 따질 겨를이 없다.
屋角梨花樹 繁華似昔年 | 집 모롱이 하얗게 피어난 배꽃 화사함 지난해와 다름없구나. |
東風憐舊病 吹送藥窓邊 | 봄바람 묵은 병이 애처로운지 약 달이는 창가로 바람 보낸다. |
북창(北窓) 정렴(鄭𥖝)의 「이화(梨花)」란 작품이다. 봄기운을 타고 집 모롱이에 배꽃이 활짝 피었다. 적막하던 마당이 환하니 밝다. 꽃은 지난해와 다름없는데 주인의 쇠락은 회복될 기미가 없다. 긴 병 끝의 꽃잔치는 마음 한 구석에 애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하지 말라고, 추운 겨울을 견뎌 활짝 핀 꽃처럼 어서 빨리 회복하라고, 봄바람은 약탕관 위로 살랑살랑 바람을 보낸다.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무상을 되새기는 정조가 애틋하고, 물아일체의 호흡이 있어 따뜻하다.
山窓盡日抱書眠 | 산창(山窓)서 하루 내내 책 안고 잠을 자니 |
石鼎猶留煮茗烟 | 돌솥엔 상기도 차 달인 내 남았구나. |
簾外忽聽微雨響 | 주렴 밖 보슬보슬 빗소리 들리더니 |
滿塘荷葉碧田田 | 못 가득 연잎은 둥글둥글 푸르도다. |
서헌순(徐憲淳)의 「우영(偶詠)」이다. 하루 종일 드러누워 책을 읽는다. 꼭 어디까지 읽어야겠다는 기필(期必)의 마음이 없고 보니, 읽다가 심심하면 차를 달여 마시고, 곤하면 가슴 위에 책을 얹고 단잠에 빠져든다. 찻물 달이던 돌솥에는 여태도 더운 기운이 남았는지 김이 오른다. 덜 깬 잠에 멍해 있는 내 후각을 자극한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고 창밖에선 사분사분 빗소리가 들린다. 흐리멍 하던 정신이 그 소리에 맑아진다. 누운 몸을 일으켜 주렴을 걷어 본다. 그 비에 씻기운 이들이들한 연잎들이 연못에 하나 가득이다. 내 마음조차 푸르러진다.
화면 속의 자아는 시인 자신이면서 풍경 속의 일부인 듯 타자화되어 있다. 시인의 진술을 듣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주관 정의(情意)가 객관 경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차 내음을 맡고 빗소리를 듣는 주체가 시인인지 나인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5. 지수술경 정의자출(只須述景, 情意自出)
이어(李漁)는 『한정우기(閑情偶寄)』에서 “정(情)을 버려두고 경(景)을 말하는 것은 노력을 줄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하상(賀裳)은 『추수헌사전(皺水軒詞筌)』에서 “시는 함축을 귀히 여기고 천직(淺直)에서 병이 든다. 시인은 마땅히 다만 경상(景象)을 묘사할 뿐이나 정의(情意)가 절로 드러나야 한다”고 하였다. 왜 경(景)만으로 보여주는가? 꼬집어 무언지도 모를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기란 큰 인내가 필요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물만을 묘사했는데 어찌 정의(情意)가 드러나는 법이 있는가.
滿空山翠滴人衣 | 초록의 연못에는 백조가 난다. |
艸綠池塘白鳥飛 | 푸른 이내 허공 가득 옷을 적시고 |
宿霧夜棲深樹在 | 깊은 숲 밤을 새운 묵은 안개가 |
午風吹作雨霏霏 | 낮바람 불어오자 비를 뿌린다. |
이진(李瑱)의 「산거우제(山居偶題)」란 작품이다. 산에 가득 떠있는 푸른 이내(嵐)에 옷이 다 젖었다. 꼭 짜면 파란 물이 들을 것만 같다. 초록의 못물 위론 백조가 난다. 시인은 파랑과 초록 물감을 화면 전체에다 온통 풀어 놓았다. 안개는 밤새 어디에 숨었다가 이렇게 몰려나온 것일까. 숲속 깊은 곳에서 밤을 지샌 묵은 안개는 날이 새고 바람이 불어가자 제 무게를 못 견뎌서 빗방울로 떨어진다. 쇄락(灑落)하다.
枳殼花邊掩短扉 | 탱자나무 울타리에 낮은 사립 닫아걸고 |
餉田邨婦到來遲 | 참을 내간 아낙네는 돌아올 줄 모르네. |
蒲茵曬穀茅檐靜 | 멍석에 나락 쬐는 추녀밑은 조용한데 |
兩兩鷄孫出壞籬 | 병아리는 짝을 지어 울 틈새로 나온다. |
양경우(梁慶遇)의 「촌사(村事)」란 작품이다. 길 가던 나그네는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실까 싶었겠다. 길가 집은 번듯한 담장도 없이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들여다봐도 인기척이 없다. 주인 아낙은 참을 내러 들에 갔는지 낮은 사립을 비스듬히 닫아걸었다. 처마 밑 양지녘에는 멍석을 깔고 갓 거둔 곡식을 말리려 널어놓았다. 고요하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주인 없는 빈 집 터진 울타리 사이로 병아리 떼가 뿅뿅뿅 짝을 지어 나서고 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포식을 해 볼 참이다. 한 폭의 정겨운 풍경화이다. 까치발을 하고 주인 없는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시인과, 천연덕스럽게 삐약대며 곡식을 향해 약진하는 병아리 떼의 행진이 읽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籬落依依半掩扃 | 반쯤 닫은 사립문에 울타리 촘촘한데 |
夕陽立馬問前程 | 석양에 말 세우고 앞길을 묻네. |
翛然細雨蒼烟外 | 푸른 안개 밖으로는 보슬비 흩뿌리고 |
時有田翁叱犢行 | 때마침 농부는 소를 몰고 오는구나. |
성간(成侃)의 「도중(途中)」이다. 싸리로 둘러친 울타리에 사립은 반쯤 열려 있다. 석양인지라 지친 나그네는 잠자리가 걱정이다. 앞길을 물어 마땅찮으면 여기서라도 묵어가야 할 형편이다. 문간을 나그네가 서성거려도, 안쪽에선 좀체 아무런 기별이 없다. 주인은 들일을 나가고 없는 것이다. 앞길을 묻는다고는 했지만, 정작 시인은 물어보려 해도 대꾸해 줄 사람조차 만나질 못하고 있다. 앞길을 묻는 나그네의 먼 시선에 푸른 안개 자옥한 저 들판 위로 흩뿌리는 보슬비의 모습이 잡힌다. 난감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이려! 이려!”하는 소리와 함께 농부가 소를 몰고 오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들일하던 농부도 땅거미 질 무렵 비마저 흩뿌리자 귀가를 서둘렀던 것이다. 문간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나그네, 소를 몰고 돌아오는 농부, 들판 가득 번져가는 푸른 안개,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 아름다운 광경이다.
東峯雲霧掩朝暉 | 동쪽 뫼에 구름 안개 아침 햇살 가리우니 |
深樹棲禽晩不飛 | 숲 깊이 깃든 새는 늦도록 날지 않네. |
古屋苔生門獨閉 | 이끼 낀 낡은 집은 빗장이 질려 있고 |
滿庭淸露濕薔薇 | 맑은 이슬 뜰에 가득 장미를 적시었다. |
최경창(崔慶昌)의 「낙봉인가(駱峰人家)」이다. 자옥한 안개가 아침 햇살을 가리고 보니, 숲속 깊은 그늘 보금자리에 깃든 새들은 해가 벌써 뜬 것도 알지 못했다. 숲은 여태도 깊은 적막 속에 잠겨 있다. 적막 속에 잠긴 것은 숲만이 아니다. 푸른 이끼 오른 고옥의 문도 굳게 잠겨 있다. 울 너머 보이는 뜨락에는 함초롬 이슬을 머금고 장미가 피었다. 새들도 날지 않는 안개 낀 아침, 그와 같이 주인도 잠에서 안 깬 걸까? 대문에 이끼가 돋았다 했으니 혹 주인을 잃은 빈집이란 말인가. 곱고도 쓸쓸한 정물이다.
祭罷原頭日已斜 | 제사 마친 들녘에 해가 기울고 |
紙錢飜處有啼鴉 | 지전 태워 뒤적이자 까마귀 우네. |
山谿寂寞人歸去 | 적막한 산골짝에 사람은 가고 |
雨打棠梨一樹花 | 팥배나무 꽃잎 위로 비가 치누나 |
권필(權韠)의 「한식(寒食)」이다. 해 저문 들녘, 한식 제사를 마친 걸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전을 사르니, 갈가마귀는 벌써부터 제사 음식을 탐하여 주변을 서성거린다. 이윽고 모두들 그렇게 돌아가 버리고, 무덤들만 남아 한층 적막해진 산골짝, 봄비는 무심히 피어난 팥배나무 꽃잎을 자꾸만 아프게 때린다. 떨어질 것만 같다. 인생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이냐. 한 세상 살다가 이렇게 떠나는 것이 가녀린 꽃잎이 빗줄기에 맞아 진흙 속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모든 것 덧없다.
시인이 경(景)만을 말하고 있어도 그 가운데는 이미 정(情)이 녹아들어 있다.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여러 대상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선택하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들어 있다. 그러기에 시에서 시인이 선택한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게 된다.
6. 즉정견경 정의핍진(卽情見景, 情意逼眞)
시경(詩經) 이래로 전통적인 인식은 ‘시언지(詩言志)’를 시의 본령으로 삼아왔다. 시란 무엇인가?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뜻이란 무엇인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이르면 다소 복잡해지지만 고대 위진(魏晉) 이전의 시들은 영물(詠物)보다는 영회(詠懷)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이런 까닭에 그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詩者, 心之發氣之充, 古人以謂讀其詩, 可以知其人].”고 하였다. 장계(張戒)가 『세한당시화(歲寒堂詩話)』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는 것이 시인의 본의(本意)이니, 물건을 읊조리는 것은 다만 시인의 여사(餘事)일 뿐이다”라 한 것은 정곡을 뚫은 말이다.
이제 경물(景物)에 대한 묘사 없이 정경(情意)의 표출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몇 수 감상해 보기로 하자.
抱兒兒莫啼 杏花開籬側 | 자장자장 우리 아가 울지 말아라 울타리 바로 옆에 살구꽃 폈다. |
花落應結子 吾與爾共食 | 꽃 지고 살구가 곱게 익으면 너랑 나랑 둘이서 같이 따먹자. |
이양연(李亮淵)의 「아막제(兒莫啼)」이다. 자장자장 자장가에 울던 아기가 방긋 웃는다. 아기의 웃음이 활짝 핀 살구꽃 같다. 저 꽃같이 예쁘게 무럭무럭 자라서 토실토실 건강하게 성장해다오. 손주를 안고 어르는 할아버지의 흐뭇한 꿈이 꽃처럼 벙긋 피어올라 살구처럼 영글어 간다. 아기는 쌔근쌔근 꿈나라 속이다. 한시에서도 이런 호흡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즐겁지 않은가. 목욕탕을 나서며 쐬는 바람처럼 시원하고 상쾌하다.
이 시를 읽다보니 필자가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독일시 한수가 떠오른다. 쉬토름(Theodor Storm, 1817~1888)의 「칠월(JULI)」이란 작품이다.
은은히 바람결에 자장가가 들린다.
덤불에 익어 얽힌 빠알간 딸기.
온 들은 축복에 가득 차 있어
무엇을 생각는가 젊은 아내여.
Klingt im Wind ein Wiegenlied,
Sonne warm herniedersieht,
Seine Ahren senkt das Korn,
Rote Beere schwillt am Dorn,
Schwer von Segen ist die Flur.
Junge Frau, was sinnst du nur?
행복한 풍경이다. 시인은 처음에 바람결에 흥얼흥얼 들려오는 나직한 자장가를 들었다. 자장가를 듣는 그의 시선에 문득 덤불 아래 황량한 풀 더미 속에 빠알갛게 익어 얽힌 딸기가 들어온다. 자장가와 딸기는 시인의 의경 속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황량한 풀 더미 속에서 싱싱한 딸기가 열매 맺듯 나의 황량하던 삶 속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을 시인은 ‘온 들에 가득한 축복’으로 미루어 버린다. 행복한 것은 자신인데, 축복은 온 들에 가득하다고 한다. 자장가는 누가 불렀던가. 이제는 자장가를 멈추고 잠든 아기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는 젊은 아내다. 젊은 아내라 했으니 그가 늙은 신랑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가시덤불 속에 열매 맺은 빠알간 딸기처럼 경이롭게 노년에 찾아든 감당키 어려운 행복을 그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아름답다.
八年七歲病 歸臥爾應安 |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누움이 외려 편하겠구나. |
只憐今夜雪 離母不知寒 | 흰 눈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제 어미 떠나고도 추운 줄 모르니 가슴 아프다. |
이필운(李弼運)의 부인 남씨(南氏)가 지은 죽은 손녀를 애도하는 시다. 여덟 살 박이 손녀는 일곱 해를 병마에 시달리다 훌쩍 떠났다. 아프다고 보채며 울던 어린 손녀는 영원한 안식이 오히려 행복하겠지. 그러나 이 겨울, 꽁꽁 언 땅 속에서 그 어린 것이 추운 줄도 모르고 누워 있을 생각을 하니, 금이야 옥이야 안스럽던 할머니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다.
임천당(任天常)의 『시필(試筆)』에서는 이 시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시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시에서 생겨난다. 경(境)과 더불어 함께 이르매 글자마다 눈물을 흘릴 만하니, 참으로 죽음을 애도하는 시의 가작이라 하겠다. 그러나 평일에 비록 친척조차도 부인이 시에 능한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또한 규방에 모범이 될 만하다.
슬픔이 지극하면 외물(外物)을 끌어들일 여유도 없는 법이다. 대저 4구가 모두 정(情)의 술회임에도 그 감정의 절절함이 비탄에 빠지지는 않아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경계를 얻었다.
平生性癖似嵇康 | 평생의 성벽이 혜강 같아서 |
懶弔人喪六十霜 | 육십 평생 초상 위문 게을렀었네. |
曾未識公何事哭 | 공을 전혀 모르는데 어찌 곡하나 |
亂邦當日守綱常 | 어지럽던 그날에 강상(綱常)을 지켜설세. |
오억령(吳億齡)은 광해 계축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의 논의가 있었을 때 분연히 일어나 그 부당함을 논단하였던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뒤에 물러나서도 이따금 천정을 우러르며, “어찌 어미 없는 나라에 처하여 구차히 살겠는가?”하는 탄식을 발하였다고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은 전한다.
당초 그의 무덤은 원주(原州)에 있었는데, 무덤을 쓴 후 두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자 묘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배천(白川) 선영으로 천장하였다. 이때는 광해의 난정(亂政)이 인조반정으로 종식되었던 때라 오억령의 천장에는 그를 사모하던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있었는데, 때마침 살아 생전 망자와는 일면식도 없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문상을 왔다. 상주가 이정구에게 가서 “선인께서는 동악공(東岳公)과는 평소 서로 알지 못하셨는데도 조문하여 주시니 감격스럽습니다. 동악공(東岳公)은 당대의 거수(鉅手)이시니 만시로 황천길을 빛내고 싶사오나 감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월사(月沙)가 동악(東岳)에게 이 뜻을 전하고 운을 불렀다. 위 시는 그때 월사(月沙)가 부른 운에 따라 동악(東岳)이 지었다는 「오참판만사(吳參判挽詞)」라는 시이다. 평소에 아는 이의 문상조차 게으르던 그가 왜 평생 면식도 없던 이를 조문 왔던가. 폭군의 서슬에 누구도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강상(綱常)으로 제 자리를 굳게 지켰던 그 정신을 사모해서라는 것이다. 옛 선비의 늠연(凜然)한 기개가 장하다. 이 시가 나오자 그때 지은 여러 만시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하였다. 오억령(吳億齡)의 이름 석자가 이 한 수로 세상에 더욱 드러났다. 위대할 손 시의 힘이여. 홍만종(洪萬宗)의 『시평보유(詩評補遺)』에는 오억령의 초상 때 지은 시로 잘못 나와 있다.
我兄顔髮曾誰似 |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가 |
每憶先君看我兄 | 아버님 생각나면 형님을 뵈었었네. |
今日思兄何處見 | 오늘 형님 보고파도 어데가 만나볼까 |
自將巾袂映溪行 | 의관을 정제하고 시내가로 나가보네. |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이다. 형님은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님 뵙듯 형님을 따랐는데, 이제 형님마저 훌쩍 세상을 뜨니, 어데 가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가만히 의관을 갖춰 입고 시내가로 나가본다. 시내에 비친 제 모습을 비춰 보려 함이다. 덤덤한 듯 별 말하지 않았으되, 그리움이 메아리 쳐 긴 울림을 남긴다.
이상 크게 다섯 가지 경우로 나누어 한시에서의 정(情)과 경(景)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이들 범주 사이에 우열은 없다. 시인의 그때그때 감정 상태나 놓인 환경에 따라 선택을 달리할 뿐이다. 그래서 청(淸)의 유희재(劉熙載)는 『예개(藝槪)』에서 “시는 혹 경(景)이 앞서고 정(情)이 뒤따르거나, 혹 정(情)이 먼저고 경(景)이 나중하거나, 혹 정(情)과 경(景)이 나란히 이르기도 하는데, 서로 떨어진 듯 서로 융합하니 각기 그 묘가 있다”고 하였다. 그 미묘한 저울질에 대해 김시습(金時習)은 「학시(學詩)」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客言詩可學 詩法似寒泉 | 객(客)은 시를 배울 수 있다 말을 하지만 시의 법은 차가운 샘물과 같은 거라. |
觸石多嗚咽 盈潭靜不喧 | 돌에 부딪치면 목메어 울다가도 연못에 가득차면 고요해 소리 없네. |
屈莊多慷慨 魏晉漸拏煩 | 굴원과 장자는 강개함 많았는데 위진(魏晉)에 이르러선 점차 번다해졌지. |
勦斷尋常格 玄關未易言 | 심상(尋常)한 격조야 끊어 없앤다 해도 묘한 이치 말로는 전하기 어렵다오. |
시는 찬 샘물이다[詩法似寒泉].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善變)을 배워야 한다. 굴원(屈原)의 시와 장자(莊子)의 산문에는 모두 강개(慷慨)의 비분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쳐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들어대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하게 되어 옛 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으로 되고 말았다. 심상(尋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아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詩法)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玄關)’이 있다. 그 현관(玄關)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무도 그 문을 여는 법은 일러 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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