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경교융 물아위일(情景交融, 物我爲一)
마음을 드러내려할 땐 오히려 감춘다
육시옹(陸時雍)은 『시경총론(詩鏡總論)』에서 “정(情)을 잘 말하는 자는 삼키고 토해냄이 깊은 듯 얕아 드러날 듯 다시금 감추어져 문득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고, 경(景)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끊어버리고 약간의 보탬만을 더하였는데도 참 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또한 흘러넘친다”고 했다. ‘욕로환장(欲露還藏)’, 즉 말할 듯 침묵하는 데서 정(情)의 맛은 더 깊어지고, ‘절거형용(絶去形容)’ 곧 시시콜콜히 묘사함을 거부하는 데서 경(景)의 상(相)은 한결 살아난다. 사실 서로 녹아 들어간 정(情)과 경(景)의 경계를 시 속에서 구분해내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박은(朴誾)만큼 역대 시화에서 자주 거론되는 시인도 없다. 중종조의 시인이었던 그는 18세기 들어 다시 각광을 받았다. 김창협(金昌協) 뿐 아니라 정조(正祖)도 박은(朴誾)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서 절창으로 일컬어진 몇 연을 살펴보자.
春陰欲雨鳥相語 | 봄 그늘 찌푸려도 새들은 조잘대고 |
老樹無情風自哀 |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만 서글프다. |
「복령사(福靈寺)」의 5.6구이다. 봄 그늘은 잔뜩 찌푸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은데, 새들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조잘댄다. 혹 비가 오려니까 새들이 불안해서 그런가 싶다가도 6구를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겠다. 풍상을 겪어 늙은 나무는 무표정하게 그대로 서 있는데, 그 무정(無情)이 서글프다고 슬퍼하는 것은 엉뚱하게 바람이라는 것이다. 찌푸린 봄 그늘과 조잘대는 새, 무정한 늙은 나무와 유정한 바람, 대구의 짜임새에 미묘한 긴장이 있다. 정작 주눅이 들어야 할 새들은 신나 있고, 담담해야 할 바람이 슬프다는 것이다. 바람이야 슬프고 말고 할 것이 없으니, 이를 슬프게 듣는 것은 시인일 밖에. 시인의 정이 경에 녹아들어 가장자리를 찾을 수 없다.
폭포와 구름에 반영된 흥망의 울분
怒瀑自成空外響 | 성난 폭포 제절로 허공 밖을 울리고 |
愁雲欲結日邊陰 | 수심 겨운 구름 엉겨 해 주변 그늘지네. |
「유역암(遊瀝巖)」의 5.6구이다. 폭포와 구름을 성나고 수심에 겨운 것으로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주관 감정이다. 분노를 머금은 폭포는 허공 밖으로 소리를 꽝꽝 울려댄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고함을 지르는 것만 같다. 구름의 근심은 밝은 태양마저도 삼킬 듯 음산한 기운으로 맺혀 있다. 구름이야 모였다 흩어지면 그뿐이니 만고(萬古)의 태양은 언제나 중천에서 저리 환히 빛난다. 전체 시가 고려의 옛 터를 찾던 나그네가 흥망의 감회를 이기지 못해 내뱉은 탄식이고 보면, 폭포의 분노와 구름의 근심을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주객이 녹아들어 정경(情景)을 분리할 수 없다.
고요한 밤의 한적한 풍경
枕上得詩吟不輟 | 베게 베고 시를 얻어 계속 읊조리자니 |
羸驂伏櫪更長鳴 | 마굿간의 마른 말도 더욱 길게 우는구나. |
夜深纖月初生影 | 밤 깊어 초승달은 그림자를 만들고 |
山靜寒松自作聲 | 고요한 산 찬 솔도 절로 소릴 내었다. |
「야와송시유감(夜臥誦詩有感)」의 첫 네 구이다. 베게를 베고 누워 이전 지은 시를 펼쳐 들고 읊조려 본다. 청을 돋워 읽다 보니 소리는 점점 낭낭해지고, 그 소리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마굿간에 엎드려 있던 파리하게 마른 말도 힝힝대며 화답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녀린 초승달도 그 여린 빛으로 마당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고요하던 산의 찬 솔조차도 파도소리를 내며 시를 읽는 내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교향악의 합주처럼 완벽한 하모니가 아닌가. 자! 여기서 어디까지가 정(情)이고, 어디까지가 경(景)인가. 무엇이 물(物)이고, 무엇이 아(我)인가.
한적한 산책에 스며든 자연
有客淸平寺 春山任意遊 | 청평사 찾아든 길손이 있어 봄 산을 제멋대로 노니는도다. |
鳥啼孤塔靜 花落小溪流 | 외론 탑 고요한데 새는 우짖고 흐르는 작은 시내 꽃잎이 지네. |
佳菜知時秀 香菌過雨柔 | 산나물 때를 알아 우쩍 자라고 이끼는 비온 뒤라 보드랍구나. |
行吟入仙洞 消我百年憂 | 신선의 골짝에서 거닐며 읊어 백년 인생 한 시름을 풀어보리라. |
김시습(金時習)의 작품이다. 첫 구의 두 자를 따서 제목을 「유객(有客)」이라 하였으니 넓은 의미의 무제시(無題詩)인 셈이다. 지금은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절이지만, 예전엔 구비구비 호젓한 산길을 걸어 들어갔다. 고려 때 선비 이자현(李資玄)이 은거해 더욱 이름 높은 절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이리저리 봄산을 배회하는 나그네의 마음은 그런대로 한적의 여유가 있다.
지는 꽃과 우는 새, 푸른 봄나물, 비에 씻겨 한결 보드라운 이끼, 모든 것이 한갓져서 그 품이 더욱 넉넉한 봄 산이다. 나그네의 자재로움이 이미 봄 산의 풍요를 품어 안았고, 봄 산 또한 따뜻하게 시인을 감싸 안는다. 외로운 탑 둘레서 우짖는 새도 쓸쓸한 시인에게 봄날의 서정이나 막막한 외로움을 부추기지 않는다. 그저 거나한 흥취를 돋워줄 뿐이다. 봄이 다 가도록 보아주는 사람도 없이 흐르는 시내 위로 떨어져 흘러가는 꽃잎을 바라보는 안타까움도 없다. 도화류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하니 어주자(漁舟者)가 이 위에 무릉(武陵)이 있는가 싶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7구의 ‘선동(仙洞)’이 이를 말해준다. 선동(仙洞)에 들고 보니, 속세에서 지녀온 백년우(百年憂) 또한 읊조리며 숲속을 거니는 사이에 이미 찾을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바라보이는 경물이되 정의(情意)와 어우러져 서로 자기편으로 당기고 이끌릴 뿐, 어느 것이 먼저고 나중인지 따질 겨를이 없다.
屋角梨花樹 繁華似昔年 | 집 모롱이 하얗게 피어난 배꽃 화사함 지난해와 다름없구나. |
東風憐舊病 吹送藥窓邊 | 봄바람 묵은 병이 애처로운지 약 달이는 창가로 바람 보낸다. |
북창(北窓) 정렴(鄭𥖝)의 「이화(梨花)」란 작품이다. 봄기운을 타고 집 모롱이에 배꽃이 활짝 피었다. 적막하던 마당이 환하니 밝다. 꽃은 지난해와 다름없는데 주인의 쇠락은 회복될 기미가 없다. 긴 병 끝의 꽃잔치는 마음 한 구석에 애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하지 말라고, 추운 겨울을 견뎌 활짝 핀 꽃처럼 어서 빨리 회복하라고, 봄바람은 약탕관 위로 살랑살랑 바람을 보낸다.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무상을 되새기는 정조가 애틋하고, 물아일체의 호흡이 있어 따뜻하다.
山窓盡日抱書眠 | 산창(山窓)서 하루 내내 책 안고 잠을 자니 |
石鼎猶留煮茗烟 | 돌솥엔 상기도 차 달인 내 남았구나. |
簾外忽聽微雨響 | 주렴 밖 보슬보슬 빗소리 들리더니 |
滿塘荷葉碧田田 | 못 가득 연잎은 둥글둥글 푸르도다. |
서헌순(徐憲淳)의 「우영(偶詠)」이다. 하루 종일 드러누워 책을 읽는다. 꼭 어디까지 읽어야겠다는 기필(期必)의 마음이 없고 보니, 읽다가 심심하면 차를 달여 마시고, 곤하면 가슴 위에 책을 얹고 단잠에 빠져든다. 찻물 달이던 돌솥에는 여태도 더운 기운이 남았는지 김이 오른다. 덜 깬 잠에 멍해 있는 내 후각을 자극한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고 창밖에선 사분사분 빗소리가 들린다. 흐리멍 하던 정신이 그 소리에 맑아진다. 누운 몸을 일으켜 주렴을 걷어 본다. 그 비에 씻기운 이들이들한 연잎들이 연못에 하나 가득이다. 내 마음조차 푸르러진다.
화면 속의 자아는 시인 자신이면서 풍경 속의 일부인 듯 타자화되어 있다. 시인의 진술을 듣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주관 정의(情意)가 객관 경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차 내음을 맡고 빗소리를 듣는 주체가 시인인지 나인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인용
1. 가장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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