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마(詩魔)와의 논쟁과 시마(詩魔) 증후군
가난과의 한 판 승부를 청한 양웅
한나라 때 양웅(揚雄)은 「축빈부(逐貧賦)」를 지어, 자기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가난’이란 놈의 축출을 시도한 적이 있다.
글을 보면, 먼저 ‘가난’을 불러내어 내 인생을 이렇듯 고달프게 만드는 연유를 따져 묻고, 이어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뒤, 지체치 말고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친다. 자못 등등한 기세다. 그러자 ‘가난’이란 녀석이 나타나 물러가는 것은 좋으나 나도 할 말이 있다며 반발한다. 추위를 견디고 더위를 참아내는 법을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었고, 걸(桀)이나 도병(盜甁) 같은 탐학의 무리를 거들떠보지 않는 기상을 길러 주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겹겹이 둘러싸인 곳에서 지내나 그대는 홀로 툭 터진 곳에서 살게 하였고, 사람들은 근심에 싸여 지내나 그대는 홀로 근심이 없게 하였다. 이것이 모두 나의 공로이다. 이렇게 말을 마친 ‘가난’은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며 “내 맹세코 너를 떠나, 저 수양산에 가서 백이(伯夷)ㆍ숙제(叔齊)와 더불어 함께 지내리라[誓將去汝, 適彼首陽, 孤竹二子, 與我連行].”하는 것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양웅이 자리를 피해 잘못을 정중히 사과하며, 다시는 원망치 않을 터이니 내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만류하는 것으로 글은 끝난다.
양웅의 승부에 자극 받아 승부를 청한 한유
뒤에 당나라 때 한유(韓愈)가 이를 본떠 다시 「송궁문(送窮文)」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궁상(窮狀)을 전송하는 글’이다. 이 글 또한 버들고리로 수레를 만들고, 풀을 엮어 배로 만들어 여기에 양식을 싣고 궁귀(窮鬼)를 전송하는 축문을 읽자, 궁귀(窮鬼)가 나타나 자신을 몰아내려는 그 행위가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진 뒤, 여기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한유가 지궁(智窮)ㆍ학궁(學窮)ㆍ문궁(文窮)ㆍ명궁(命窮)ㆍ교궁(交窮) 등 자신을 평생 따라 다니는 다섯 가지 궁상(窮狀)의 실체를 낱낱이 열거하며, 이 때문에 괴로워 살 수가 없으니 제발 나가 달라고 요청하자,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 다섯 귀신이 나와 눈을 부릅뜨고 혀를 차며 항의하기를, 사람이 나서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잠깐일 뿐인데, 내가 그대의 이름을 세워 백세토록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거늘 그 공이 어찌 작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를 쫓아내려 하다니 참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주인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기운이 꺾이어 손을 들어 사죄하고, 수레와 배를 불사른 뒤 궁귀(窮鬼)를 삼가 윗자리로 모셔 앉혔다는 이야기다.
두 작품 모두 가난과 궁상이 시인에게 KO승을 거두고 있다. 시인이 오죽 가난을 달고 살았으면, 가난을 몰아내고 궁상을 쫓아낼 마음을 먹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운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나마도 축출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일장훈계만 듣고 주저 물러앉았으니 더더욱 처량한 일이다.
이규보, 가난과의 한 판 승부
이규보(李奎報)도 이와 비슷한 작품을 남긴 것이 있다. 그는 앞서 「시벽(詩癖)」이란 시만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구시마문(驅詩魔文)」, 즉 ‘시 귀신을 몰아내는 글’을 지었다. 시마(詩魔)와의 논쟁 역시 이규보의 참패로 끝나지만, 시마(詩魔)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흥미로운 글이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먼저 생명이 없는 사물에 귀신이 붙게 되면 괴상하고 요사한 일들이 나타난다고 하고, 사람에게도 이러한 귀신이 붙을 수 있다 하였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에는 바탕이 순박하여 꾸밈이 없고 순후 정직하였지만, 한 번 시에 빠지게 되면 그 말을 요사하게 하고 괴상하게 하여 사물을 희롱하고 남을 현혹시키니 이것이 모두 시마(詩魔)의 농간이라 하며, 이제 그 죄상을 낱낱이 밝혀 시마를 내게서 몰아내고자 한다고 엄숙히 선언하였다. 이어 이규보는 시마의 죄상을 모두 다섯 가지로 나누어 신랄하게 성토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꿈에 의복을 화려하게 입은 시마(詩魔)가 찾아와서 질책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그대와 함께 지내왔고, 성년이 된 뒤에는 언제나 그대의 뒤를 따르면서 그 기운을 웅장하게 해주었고 문장을 화려하게 해주어, 과거에 해마다 급제하여 명성이 사방으로 퍼지게 하였고, 벼슬아치와 귀족들까지도 그대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하게 하였으니 나의 공이 적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지 않으며 여색에 탐닉하고 술을 즐기는 것은 너의 삼가지 않는 탓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이같은 시마의 질책에 그는 꼼짝없이 수긍하며 부끄럽고 황송하여, 절하여 스승으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마(詩魔)가 붙었는지 붙지 않았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없을까. 이규보(李奎報)는 시마(詩魔)가 자신에게 들어온 뒤 나타난 이상한 증상들을 이렇게 적고 있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게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自汝之來, 萬狀崎嶇, 悗然如忘, 戇然如愚, 如瘖如聵, 形熱跡拘. 不知飽渴之逼體, 不覺寒暑之侵膚, 婢怠莫詰, 奴頑罔圖, 園翳不薙, 屋痡不扶. 窮鬼之來, 亦汝之呼. 傲貴凌富, 放與慢俱, 言高不遜, 面強不婾, 着色易惑, 當酒益麤, 是實汝使.
한 마디로 말해, 시마(詩魔)의 증후는 시 이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현상이다.
시마가 오고부터 내 삶에 생긴 변화
이규보(李奎報)의 「구시마문(驅詩魔文)」이 있은 뒤, 조선 중기의 문인 최연(崔演)이란 이가 이규보의 글을 본받아, 다시 「축시마(逐詩魔)」란 글을 남겼다. 최연은 시마가 자신에게 온 뒤 나타난 증세를 이렇게 쓰고 있다.
네가 오고부터 술에 어리 취한 것 같고 바보가 된 듯 멍하게 신음하며 구슬퍼 하여 한 병부(病夫)가 되고 말았다. 장차 네게서 벗어나고자 일 년 내내 애를 썼으나, 네게서 떠나고자 산에 올라가면 너는 어느새 나를 따라 노닐고, 바다로 들어가면 너는 어느새 나를 찾아내는구나. 사물을 만나면 눈길을 쏘아보아 취함이 많아도 그만두지 않았고, 내 이목(耳目)의 총명함을 빼앗아 가서 나의 보고 들음을 어지럽게 하였고, 머리가 쑥대가 되어도 빗질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칠어도 다스릴 줄 모르고, 성글고 게을러 의논을 자초하며, 교만하고 오만하여 허물을 불러들이고, 기림은 뭇 사람의 뒤에 있고, 꾸짖음은 다른 사람의 앞에 있게 하니, 나를 굶주리게 하고 나를 빈한하게 하는 것이 또한 네가 불러들인 것이다.
自從爾來, 如醉如愚, 呻吟悽楚, 作一病夫. 逝將去汝, 卒歲優遊, 舍爾陟岡, 爾從我遊, 舍爾入海, 爾復我求. 遇物騁矚, 多取無已, 奪我聰明, 眩我視聽, 頭蓬不梳, 心穢莫理, 疏慵招議, 驕傲致愆, 譽居衆後, 責在人先, 飢我寒我, 亦爾致然.
지금 자신이 시마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보려면 위의 여러 증후들을 시인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볼 일이다.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시 생각 뿐, 이 밖에 다른 것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니 염치니 체모니 하는 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는 증세,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고야 말게 만드는 증세가 이른바 시마(詩魔) 증후군이다. 만일 이런 자각 증세가 있다면 그 또한 시마(詩魔)에 붙들린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용
3. 시마의 죄상
6.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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