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6. 개미와 이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6. 개미와 이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13:32
728x90
반응형

 6. 개미와 이

 

 

일찍이 높은 산에 올라 성시(城市)를 굽어보니 마치 개미굴 같았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높은 데서 바라보니 참으로 한 번 웃을 만했다. 산이 성시(城市)보다 높다한들 능히 얼마나 되랴마는, 그런데도 이미 이와 같으니, 하물며 진짜 신선이 허공 속에 있으면서 티끌세상을 굽어본다면 또 어찌 다만 개미굴이겠는가?

 

 

허균(許筠)한정록(閒情錄)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옛 사람이 보허등공(步虛登空)하여 하계(下界)를 조감하는 유선시(遊仙詩)에는 이러한 광경을 노래한 구절이 있다. 김시습(金時習)능허사(凌虛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下視塊蘇嗟渺渺 굽어보니 땅 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大鵬飛少蠛蠓多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만 우글대네.

 

임제(林悌)효적선체(效謫仙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下視東華土 茫然但黃埃 아래로 동화(東華) 땅을 내려다보니 아득히 다만 누런 먼지 뿐.

 

근교 산에 올라가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노라면, 그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저 안에서 복작대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가소롭기도 하다. 그럴 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은 마치 구름 위에 신선인양 통쾌한 호연지기를 심어주기에 족하다. 대개 시인들이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들의 작태를 조소하고 비웃고, 때로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이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朴趾源)벗에게 보낸 엽서에 보면 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내가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 그 도읍(都邑)을 굽어보니 그 사람과 물건이 달리고 뛴다는 것이 땅에 엎어져 꿈틀꿈틀 하는 듯하여, 마치 개미굴의 개미와 같아 능히 한 번 훅 불면 흩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언덕을 더위잡고 바위를 따라 덩굴을 잡고 나무를 안고 꼭대기에 올라,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체 하는 것은 또한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것과 무에 다르겠는가.

僕嘗登藥山, 俯其都邑, 其人物之若馳若騖者, 撲地蠕蠕, 若屯垤之蟻, 可能一噓而散也. 然復使邑人而望吾, 則攀崖循巖, 捫蘿緣樹, 旣躋絶頂, 妄自高大者, 亦何異乎頭蝨之緣髮耶?

 

 

그러고 보면 시인들의 산 아래를 향한 연민에 찬 탄식이나, 조소 넘치는 비아냥도 저 아래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잖기 그지없는 일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와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하는데,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 위에서 비틀대는 이 같다고 하고, 괜히 저 혼자만 고상한 체 한다고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시를 무가치하게 보다

 

사실 실용적으로만 말한다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공연히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이 끙끙대지만, 실제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김종직(金宗直)영가연괴집서(永嘉連魁集序)에서, “문장은 잗단 기예(技藝)이다. 시부(詩賦)는 더더욱 문장의 보잘 것 없는 것이다[文章, 小技也. 而詩賦, 尤文章之靡者也].”라고 했는데, 앞뒤 헤아리지 않고 보면 시()란 것은 소기(小技)인 문장 중에서도 가장 하급에 속하는 것이 된다. 정약용(丁若鏞)은 또 오학론(五學論)에서 문장학이란 우리 도()의 커다란 해독이다. 대저 이른바 문장이란 것은 무엇이던가? 문장이란 허공에 걸려 있고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바람을 보고 달려가 붙잡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겠는가[文章之學, 吾道之鉅害也. 夫所謂文章者何物? 文章豈掛乎空布乎地, 可望風走而捉之者乎]?”라고 하고, 나아가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글은, 한 평생 읽고 외워 본들 슬프고 우울하기만 하지 천하와 국가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문학의 심각한 해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시에 가치를 부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이(李珥)인물세고서(仁物世藁序)에서 말이란 것은 소리의 정채로운 것이고, 문사(文辭)란 것은 말의 정채로운 것이며, ()란 것은 문사(文辭)의 빼어난 것이다[言者, 聲之精者也; 文辭者, 言之精者也; 詩者, 文辭之秀者也].”라고 하였다. 권필(權韠)시라는 것은 말의 정채로운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시()는 또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이다.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많다. 춤이니 그림이니 하는 것들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않고, 그다지 기쁘게 해주지도 못한다. 마라톤 주자가 42.195Km를 달린다 한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황영조의 쾌거에 마음 설렌다.

 

 

 

시인의 마음가짐

 

오늘날 말하는 당() 나라 때의 시의 융성은 앞서 여러 제가의 시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은 미친 듯한 열기와 목숨을 건 집착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두 눈을 바늘로 찌르며, 심장을 다 토해낼 듯, 가슴 속에 찬 서리가 든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오직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 쏟아 부었다. 고인(古人)의 이러한 거울 위에 오늘의 시단(詩壇)을 비추어 보면 어떨까? 날마다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가 넘쳐흐르지만, 낙루(落淚)의 감격은 고사하고 수염을 꼬는 고심의 흔적도 찾지 못할 시가 수두룩하다. 정신은 간 데 없이 껍데기만 남은 시가 너무도 많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이 아무 데에 쓸모없는 시를 짓느라고 고금(古今)에 피를 말리며 밤을 지새는 시인을 어찌 손 꼽을 수 있으랴. 그 고심참담의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삶의 깊은 의미를 읽는다. 중요한 것은 시가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이든,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害毒)이든 간에 시는 시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보석으로 만들고 독약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2018년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며 전주 상공에서 찍은 사진.

 

 

 

인용

목차

1. 예술(藝術)과 광기(狂氣)

2.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4.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6. 개미와 이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