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귀(詩鬼)와 귀시(鬼詩)
김덕령의 시인가, 권필의 시인가
시마(詩魔) 이야기를 꺼낸 김에 시와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시화(詩話)를 보면 또 시귀(詩鬼)와 귀시(鬼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마(詩魔)가 보통 지속적으로 시인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라면, 시귀(詩鬼)는 일회적으로 시인의 입을 빌어 대신 노래하게 하거나, 그 자신이 홀연히 나타나 시를 읊조리기도 하는 귀신이다. 또 이 시귀(詩鬼)가 지은 시를 귀시(鬼詩)라 한다.
광주 교외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명장 김덕령(金德齡)을 모신 사당 충장사(忠壯祠)와 취가정(醉歌亭)이란 정자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조직하여 위국진충(爲國盡忠)하였으나 간신배의 모함을 입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와 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권필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김덕령의 시집을 얻었다. 그 첫머리에는 「취시가(醉時歌)」란 작품이 실려 있었다. 그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醉時歌 | 취했을 때의 노래 |
此曲無人聞 | 이 노래 아무도 듣는 이 없네. |
我不要醉花月 | 내사 꽃 달에 취함도 바라잖코 |
我不要樹功勳 | 내사 공훈을 세움도 원치 않네. |
樹功勳也是浮雲 | 공훈을 세우는 것, 뜬 구름일 뿐이요 |
醉花月也是浮雲 | 꽃 달에 취하는 것, 그 또한 뜬 구름. |
醉時歌 | 취했을 때의 노래 |
無人知 | 아무도 모른다네. |
我心只願長釼奉明君 | 내 마음 다만 긴 칼 들고 밝은 임금 받들고 싶을 뿐. |
자! 이 시는 김덕령이 지은 것인가? 아니면 권필(權韠)이 지은 것인가? 물론 세상에는 김덕령의 시집이란 것은 있지도 않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권필의 꿈에 그가 나타나 부른 노래는 과연 그의 시라 보아 좋을 것인가? 실제로 광주(光州)의 취가정(醉歌亭)에는 권필이 꿈에서 보았다는 이 시가 현판에 새겨져 걸려 있다.
시귀가 한 짓
권필(權韠)은 이 시 말고도 꿈속에서 지은 시를 여러 편 문집에 남기고 있다. 어느 날 밤 꿈에 텅빈 집에 들어갔다. 때는 저물녘인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낙엽은 뜨락에 가득하였다. 문득 이별을 원망하고 시절을 상심하는 느낌이 일어 꿈속에서 시를 지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空村寂寞掩柴扉 | 텅빈 마을 적막하여 사립을 닫고 |
滯臥殊方故舊稀 | 낯선 땅 머물자니 옛 벗도 없네. |
送盡夕陽人不到 | 저녁 해 다 지도록 아무도 오질 않고 |
滿庭紅葉雨霏霏 | 뜰엔 가득 붉은 잎, 비만 부슬부슬. |
시상(詩想)이 처고(悽苦)하여 자못 귀기(鬼氣)마저 감돌고 있다. 평소 얼마나 시를 가지고 마음을 졸였으면 꿈에서까지 시를 짓겠는가. 실제 요즘의 시인들에게도 이 같은 현상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권필(權韠)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심씨(沈氏) 성을 가진 선비가 지금의 종암동 어귀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한 서생을 만났다. 그 서생은 절구 한 수를 읊조리더니, 홀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春水微茫柳絮飛 | 봄 물은 아득하고 버들개지 날리는데 |
野風吹雨點征衣 | 들 바람 비 불어와 정의(征衣)를 점 찍네. |
原頭古墓淸明近 | 들머리 옛 무덤엔 청명(淸明)이 가까운지 |
落日寒鴉啼不歸 | 지는 해에 갈가마귀 울며 돌아가잖네. |
심생은 이상하게 여기고 돌아와 권필에게 자신이 기막힌 시구를 얻었노라며 자랑하였다. 이 시를 듣고 난 권필은, “이것은 귀신의 작품일세. 결코 그대의 솜씨가 아니야”라 하였다. 심생은 크게 놀라 사실대로 말하였다. 『시평보유』에 나온다.
꿈속에서 지은 시를 알아보다
이와 같이 귀신이 나타나 시를 지은 경우가 시화에 종종 나타난다. 윤결(尹潔)이 차식(車軾)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지은 오언시 한 수를 들려주며 어떠냐고 물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偶入石門洞 吟詩孤夜行 | 우연히 석문동(石門洞) 골짝에 들어 밤길에 시 읊으며 외로이 갔네. |
月午澗沙白 空山啼一鶯 | 달은 중천에 떠 백사장 모래 밝은데 빈산에선 새 한 마리 울음 울었다. |
시를 듣고 난 차식은 “이것은 귀시(鬼詩)일세[此乃鬼詩也].”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윤결(尹潔)이 깜짝 놀라, “사실 내가 간 밤 꿈에 한 깊은 골짝에 놀러 갔는데, 백사장이 십여 리나 펼쳐져 있고 달빛은 마치 그림 같은데, 어디선가 꾀꼬리 소리가 들려왔었네. 그곳의 이름을 물어보니 석문(石門)이라 하더군. 그래서 꿈속에서 지은 것이야[余夜夢遊一深洞, 白沙十餘里, 月色如晝, 有一鶯聲, 問其洞, 乃石門也].”라고 실토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에 나온다. 과연 그 시를 보면 시상(詩想)이 맑고 서늘하여 보통 사람이 능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귀신이 남긴 시
또 고려 때 어떤 선비가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날이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 취해 쓰러져 누워 있는데, 갑자기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澗水潺湲山寂歷 | 시냇물 졸졸졸 산은 적막한데 |
客愁迢遞月黃昏 | 나그네 시름 가이 없고 달빛은 황혼이라. |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자신이 누웠던 산 길 옆에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또 귀신 박률(朴嵂)이 지었다는 시도 있다.
海棠秋墜花如雪 | 해당화 지는 가을, 꽃잎은 눈 같은데 |
城外人家門盡關 | 성 밖 인가엔 문이 죄다 걸려있네. |
茫茫丘壟獨歸去 | 아득한 언덕길을 홀로 돌아가려니 |
日暮路遠山復山 | 길은 먼데 날 저물고 산만 첩첩하구나. |
또 권겹(權韐)이 만났던 귀신은 이런 시를 남겼다.
樓坮花雨十三天 | 누대의 꽃비가 십삼천에 나리는데 |
磬歇香殘夜闃然 | 풍경 소리 뚝 그치고 향조차 사라진 밤. |
窓外杜鵑啼有血 | 창밖의 두견새는 피 토하며 우는 구나 |
曉山如夢月如烟 | 새벽 산 꿈속 같고 달빛은 안개 같네. |
모두 『소화시평(小華詩評)』에 보인다. 이상 살펴본 몇 수의 귀시(鬼詩)들은 모두 음운이 고절(高絶)하고 처량하여 확실히 인간의 말이 아니다.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 홍만종(洪萬宗)은 이를 소개한 뒤, “귀신도 자신의 시를 아껴, 왕왕 놀랄만한 시구가 있으면 반드시 사람의 힘을 빌어 세상에 전함으로써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豈鬼神亦自愛其詩, 往往有警作, 則必借人傳世, 以暴其才歟]”라 하였다.
10년 만에 완성한 대구
또 선조 때 문인 양희(梁喜)가 눈 오는 밤에 매화를 감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시구를 얻었다.
雪墮吟脣詩欲凍 | 읊는 입에 눈 내리자 시조차 얼려하고 |
그러다 마침내 그 바깥짝은 채우지 못하고 잊어 버렸다. 십년 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대는 왜 ‘시욕동(詩欲凍)’의 구를 계속 잇지 않는가?” 하더니 다음과 같은 시구를 읊조리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梅飄歌扇曲生香 | 부채에 매화 나부끼니 노래에 향기 나네. |
그래서 마침내 한 편 시를 이루었다.
혹 이 시화는 달리 이런 이야기로도 전한다. 충청도에 시에 능한 두 형제가 있었는데, 아우가 형만 못하였다. 분통이 터진 아우는 화가 나 요절하고 말았는데, 원귀가 되어 형에게 달라붙었다. 집안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꾸짖으니, 아우의 귀신이 “내가 시 한 구절을 부르겠다. 능히 대구한다면 다시는 달라붙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위 ‘시욕동(詩欲凍)’의 구절을 읊조리므로 형이 ‘곡생향(曲生香)’의 구로 응대하자 귀신은 슬피 울면서 그에게서 떠나갔다. 『동시화(東詩話)』에 전한다.
시를 짓게 하는 귀신의 정체
또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보면 고려 때 김지대(金之岱)가 의성관루(義城館樓)에 시를 지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는데, 뒤에 전란으로 누각이 불타버려 시판(詩板)도 따라서 없어졌다. 몇십 년 뒤 오적장(吳迪莊)이란 이의 딸이 미쳐 발광했는데 어지러이 말하는 가운데 갑자기 김지대의 시를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는 다시 시판에 새겨 전해졌다. 이른바 귀신도 또한 시를 사랑하여, 능히 잃지 않도록 지켜 다시 세상에 전해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시 귀신에 얽힌 이야기들은 모두 시인들의 시를 향한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상일 뿐이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그렇게 노래한 것이 아니던가.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도 않고 인간에게 해꼬지를 하는 법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귀신들은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인 셈이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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