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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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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구양수(歐陽修)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이를 고쳤는데, 마지막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蘇東坡)적벽부(赤壁賦)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단숨에 이를 지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했으니 그간의 고초를 헤아려 무엇하랴. 사문유취(事文類聚)에 나온다.

 

송자경(宋子京)이란 이가 나는 번번이 예전에 지은 문장을 볼 때마다 그것을 미워하여 반드시 불태워 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매요신(梅堯臣)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글이 진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 또한 그러합니다.” 매요신(梅堯臣)은 앞서 여러 시인이 그랬듯 시()에 고질(痼疾)이 들었던 시인으로, 그는 아예 시벽(詩癖)을 제목으로 시를 지은 것이 있다.

 

人間詩癖勝錢癖 인간의 시벽(詩癖)이 돈 욕심 보다 더하니
搜索肝脾過幾春 애간장 졸이며 시구 찾느라 몇 봄을 보냈던고.
囊槖無嫌貧似舊 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風騷有喜句多新 새로운 시구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
但將苦意摩層宙 다만 괴로이 층층의 하늘을 치달았을 뿐
莫計終窮涉暮津 곤궁 속에서 저승 갈 일은 따지지도 않았다.

 

시에 대한 고질도 이쯤 되면 편작(扁鵲)이 열이라도 고칠 방도는 없게 되고 만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시와 무관한 것이 없고 보니,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매 순간 순간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한유(韓愈)는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슬프다.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可憐無益費精神].”라고 자조한 바 있다. 이수광(李晬光)은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대체로 사람의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眞氣)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은 시라는 마물(魔物)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간혹 감흥이 일어난 때에 짓는 것은 좋으나 어찌 마땅히 남에게 좇아 나의 심신의 알맹이를 손상하겠는가[夫弊人精神以耗眞氣, 詩魔之爲也. 其或遇興爲之則可矣, 豈宜徇人而喪吾實乎].라는 충고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 사람들은 기양(技癢)’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바로 기양(技癢)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眞氣)를 온통 소모해 가면서까지 순단월련(旬鍛月鍊),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하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魔物)이 있으니, 옛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詩魔)라 했다.

 

 

 

이규보와 시마

 

이규보(李奎報) 또한 매요신(梅堯臣)과 마찬가지로 시벽(詩癖)이란 제목의 긴 시를 남긴 바 있다.

 

年已涉縱心 位亦登台司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三公)에 올라 보았네.
始可放雕篆 胡爲不能辭 이제는 시 짓는 일 놓을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능히 그만 두지 못하는가.
朝吟類蜻蛚 暮嘯如鳶鴟 아침엔 귀뚜라미처럼 읊조려 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양 노래 부르네.
無奈有魔者 夙夜潛相隨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 와서는,
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한 번 붙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 짜내지.
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다 빠져 살에는 남아 있질 않다오.
骨立苦吟梞 此狀良可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우스웁구나.
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그렇다고 놀랄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만한 것도 없다네.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 손바닥을 부비며 홀로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生死必由是 此病醫難醫 살고 죽는 것이 필시 시 때문일 터이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렵도다.

 

아쉬울 것 없는 일흔을 넘긴 노인이 피골이 상접하도록 시작(詩作)에만 몰두하는 가긍한 정황을 적고 있다. 죽고 사는 것이 시에 달려 있다 했으니 이쯤 되면 병도 중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 때문에 생긴 증세를 자가(自家) 진단하는 마당에서도 시로써 그 처방을 내리고 있으니, 과연 시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삶의 보람은 없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시마(詩魔) 때문이라 하였는데, 이 시마(詩魔)란 놈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김득신과 시마

 

김득신(金得臣) 또한 고음(苦吟)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에 몰두할 때면 멍하니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한 번은 점심상에 상치를 얹어 내오면서 일부러 초장을 놓지 않았다. 작시에 골몰한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초장이 없는데 싱겁지도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응응! 모르겠어.” 했더란다. 동시화(東詩話)에 보인다.

 

그도 시벽(詩癖)시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爲人性癖最耽詩 이 내 성벽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詩到吟時下字疑 시 지어 읊을 제면 글자 놓기 망설이네.
終至不疑方快意 끝내 의심 없어야만 비로소 통쾌하니
一生辛苦有誰知 일생의 이 괴로움 알아줄 이 그 누구랴.

 

한 글자라도 바로 놓이지 않으면 마음에 쾌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평생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히니, 그 사이의 괴로움을 누가 알겠느냐는 넋두리다. 이어 그는 ! 오직 아는 자라야 이러한 경계를 더불어 말할 수 있으리라. 지금 사람들은 얕은 배움으로 경솔하게 시를 지으면서도 남을 놀래킬 말만 지으려 든다.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 唯知者, 可與話此境. 今人以淺學率爾成章, 便欲作驚人語. 不亦踈哉]?”라는 말을 덧붙였다. 종남총지(終南叢志)에 보인다.

 

 

 

 

인용

목차

1. 예술(藝術)과 광기(狂氣)

2.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4.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6. 개미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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