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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0. 시마 이야기 - 1. 즐거운 손님, 시마(詩魔)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0. 시마 이야기 - 1. 즐거운 손님, 시마(詩魔)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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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시마(詩魔) 이야기

 

 

1. 즐거운 손님, 시마(詩魔)

 

 

시를 짓지 않고 배길 수 없게 하는 시마

 

앞에서 이규보(李奎報)시벽(詩癖)이란 작품을 소개하면서, 시마(詩魔)에 대해 잠시 말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 시마(詩魔)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시마(詩魔)란 말 그대로 시 귀신이다. 이 시마(詩魔)는 어느 순간 시인의 속으로 들어와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만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이 귀신이 한 번 붙고 나면 그 사람은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되며, 짓는 시마다 절창이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실제로 예전 시화(詩話)를 보면 이 시마(詩魔)에 관한 삽화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선조 때 사람 이현욱(李顯郁)이란 이에게 붙었던 시마(詩魔)이다. 이산해(李山海)는 그의 시를 몹시 아껴 늘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달(李達)이 어느 날 이산해를 보러 가니 이현욱의 시를 보여주며 품평케 하였다. 그의 시 가운데 소리도 없이 찾아온 설레이는 봄빛을 노래한 시는 다음과 같다.

 

步復無徐亦不忙 걸음걸이 느리지도 바쁘지도 않건만
東西南北遍春光 동서남북 온통 모두 봄빛이구나.

 

이 구절을 본 이달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입니다. 역대 어떤 시인도 일찍이 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나이가 젊으니 반드시 시마(詩魔)를 얻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산해는 이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지은 시는 말이 모두 탈속(脫俗)하고 격이 노창(老蒼)하였는데, 과연 뒤에 시마(詩魔)가 떠나가자 그는 시는커녕 한 글자도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동안 이현욱의 시는 그가 쓴 것이 아니라 시마가 이현욱을 시켜 대신 구술한 셈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시마(詩魔)는 제멋대로 시인에게 들어왔다가는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기도 하는 재미있는 귀신이다. 시마가 붙으면 이규보(李奎報)의 경우처럼 시를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게 되나, 일단 시마가 떠나기만 하면 아예 시를 짓고 싶은 생각도 없어질 뿐 아니라, 제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서글프면서도 희열에 차게 만드는 그놈, 시마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 이상스레 잘 안 될 때도 우리는, “필시 마()가 낀 게야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란 무슨 일을 잘 안 되도록 방해하는 방해꾼이다. 그런데 이 시마(詩魔)란 놈은 적어도 시인에게 있어서는 방해꾼이 아니라 언제고 환영해야 할 손님이다. 시마가 붙고 나면 그냥 하는 말도 모두 기가 막힌 시가 되는데, 시마가 떠나고 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말이다.

 

백거이(白居易)는 일찍이 취음(醉吟)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酒狂又引詩魔發 주광(酒狂)에다 더하여 시마(詩魔)까지 끌어와
日午悲吟到日西 한낮부터 슬피 읊다 저물녁이 되었네.

 

술에 흠뻑 취한 그에게 시마(詩魔)까지 들러붙었으니, 밝은 대낮부터 구슬프게 읊조리기 시작한 시가 땅거미가 뉘엿해지도록 그칠 줄 모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내 시를 아껴주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는 오직 그대뿐입니다. 그러나 천백년 뒤에 어찌 다시 그대 같은 사람이 나와서 나의 시를 알아주고 아껴주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8, 9년 이래로 그대와 더불어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시로써 서로 경계하였고, 조금 어렵게 되면 시로 서로를 권면하였으며, 떨어져 있을 때에는 시로써 위로하였고, 같이 지낼 때에는 시로 서로 즐기었으니, 나를 알아 줄 것도 시요, 나를 죄줄 것도 시일뿐입니다.

今所愛者, 並世而生, 獨足下耳. 然百千年後, 安知複無如足下者出, 而知愛我詩哉. 故自八九年來, 與足下小通則以詩相戒, 小窮則以詩相勉, 索居則以詩相慰, 同處則以詩相娛, 知吾罪吾, 率以詩也.

 

금년 봄 성남에 놀러 갔을 때에, 차례로 읊조리고 노래하니 소리가 끊이지 않은 것이 이십여 리나 되었었지요. 나를 아는 사람은 시선(詩仙)이라 여겼고, 나를 알지 못하는 자는 시마(詩魔)라고 생각했을 겝니다.

如今年春遊城南時, 與足下馬上相戲, 因各誦新豔小律, 不雜他篇. 自皇子陂歸昭國裏, 叠吟遞唱 不絕聲者二十裏余. 李在傍, 無所措口. 知我者以爲詩仙, 不知我者以爲詩魔.

 

왜냐구요?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괴로운 줄도 알지 못하니 시마(詩魔)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우연히 다른 사람과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마주하거나, 혹 꽃 필 때 잔치를 마치거나, 혹 달밤에 술이 거나해지면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읊으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비록 난새와 학을 타고서 봉래와 영주에서 노니는 자의 즐거움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테지요. 그러니 또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何則? 勞心靈, 役聲氣, 連朝接夕, 不自知其苦, 非魔而何? 偶同人當美景, 或花時宴罷, 或月夜酒酣, 一詠一吟, 不覺老之將至. 雖驂鸞鶴遊蓬瀛者之適, 無以加于此焉, 又非仙而何?

 

 

이 글은 자신의 문학 인생을 담담히 술회하고 있는 장문의 편지인데, 자신의 불우를 되새기는 약간은 서글픈듯한 어조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시를 짓는 즐거움을 남들은 시마(詩魔)에 붙들린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신선의 경지와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노라고 하여, 현세의 말할 수 없는 불우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길에서 느끼는 그윽한 희열을 예찬하고 있다.

 

 

 

 

인용

목차

1. 즐거운 손님, 시마(詩魔)

2. 시마와의 논쟁과 시마 증후군

3. 시마의 죄상

4. 시귀(詩鬼)와 귀시(鬼詩)

5. 귀신의 조화와 시인의 궁달

6.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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