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귀(詩鬼)와 귀시(鬼詩)③
10년 만에 완성한 대구
또 선조 때 문인 양희(梁喜)가 눈 오는 밤에 매화를 감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시구를 얻었다.
雪墮吟脣詩欲凍 | 읊는 입에 눈 내리자 시조차 얼려하고 |
그러다 마침내 그 바깥짝은 채우지 못하고 잊어 버렸다. 십년 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대는 왜 ‘시욕동(詩欲凍)’의 구를 계속 잇지 않는가?” 하더니 다음과 같은 시구를 읊조리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梅飄歌扇曲生香 | 부채에 매화 나부끼니 노래에 향기 나네. |
그래서 마침내 한 편 시를 이루었다.
혹 이 시화는 달리 이런 이야기로도 전한다. 충청도에 시에 능한 두 형제가 있었는데, 아우가 형만 못하였다. 분통이 터진 아우는 화가 나 요절하고 말았는데, 원귀가 되어 형에게 달라붙었다. 집안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꾸짖으니, 아우의 귀신이 “내가 시 한 구절을 부르겠다. 능히 대구한다면 다시는 달라붙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위 ‘시욕동(詩欲凍)’의 구절을 읊조리므로 형이 ‘곡생향(曲生香)’의 구로 응대하자 귀신은 슬피 울면서 그에게서 떠나갔다. 『동시화(東詩話)』에 전한다.
시를 짓게 하는 귀신의 정체
또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보면 고려 때 김지대(金之岱)가 의성관루(義城館樓)에 시를 지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는데, 뒤에 전란으로 누각이 불타버려 시판(詩板)도 따라서 없어졌다. 몇십 년 뒤 오적장(吳迪莊)이란 이의 딸이 미쳐 발광했는데 어지러이 말하는 가운데 갑자기 김지대의 시를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는 다시 시판에 새겨 전해졌다. 이른바 귀신도 또한 시를 사랑하여, 능히 잃지 않도록 지켜 다시 세상에 전해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시 귀신에 얽힌 이야기들은 모두 시인들의 시를 향한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상일 뿐이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그렇게 노래한 것이 아니던가.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도 않고 인간에게 해꼬지를 하는 법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귀신들은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인 셈이므로.
인용
9. 귀신(鬼神)의 조화와 시인(詩人)의 궁달(窮達)①
10. 귀신(鬼神)의 조화와 시인(詩人)의 궁달(窮達)②
11.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