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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카자흐스탄 여행기 목차 여는 글 카자흐스탄 여행과 공감능력 1주차(알마티 한국어교육원) 13.06.14(금) 경계를 넘어서다비행기를 타고 알마티로알마티의 한국어 교육원 13.06.15(토) 정신승리란?도로 인프라와 서구중심주의긴장의 미학 13.06.16(일) 카자흐스탄의 택시고려인, 존경받는 민족이 되다카자흐스탄의 음식 13.06.17(월) 6월에 함박눈을 맞다알마티의 콕토베맛있는 걸 왜 먹질 못하니 13.06.18(화) 수수하게 밋밋하게전통과의 연결점인 유르타알마티 시내 돌아보기 13.06.19(수) - 아스타나로의 기차여행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21시간을 달리는 기차 13.06.20(목) - 아스타나 둘러보기 새 수도에 그린 꿈바이테렉과 카자흐스탄의 꿈자본의 중심지로 우뚝 서다한국문화원을 둘러보다이슬람..
70. 나아감과 멈춤의 조화에 대해 오늘은 알마티에 가는 날이다. 알마티를 떠나서 탈디쿠르간과 우슈토베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한 지 벌써 2주가 흘렀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시 알마티의 교육원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치 한국에 돌아가는 것 같이 기분마저 든다. 그만큼 어느새 알마티 한국교육원은 우리에게 ‘홈타운’ 같은 곳이 되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1주일간 머물렀을 뿐인데도 정이 듬뿍 들어 언제 돌아가도 우릴 반겨줄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겠지. 더욱이 교육원엔 여전히 교육생들이 있다. 우리가 교육원에 있을 때 교육원생들과 단재학교 여학생들이 엄청 친해졌다. 밤마다 모여 수다도 떨고 놀기도 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더 빨리 알마티로 돌..
65. 우슈토베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오전엔 자원봉사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어 현지 학생들과 색종이 접기와 그림 그리기를 했다. 현지 학생 이래봐야 10명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선 단재학교 학생들에게 색종이 접는 법을 연습시키고 무얼 그릴지 미리 회의를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 아이들끼리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도 좋지만, 전체 회의를 하여 무엇을 만들고 그릴지 정하고 연습시켰어야 했는데, 그 땐 그런 생각을 못했다. 아마도 ‘색종이 접기는 아이들이 다할 줄 알 테니, 각자에게 맡겨줘도 잘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는 혜린이 특기이니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다.’라는 ‘케세라세라’..
62. 집중의 본래면목 우슈토베에서 마지막 일정이 있는 날이다. 내일은 아침만 먹고 알마티로 떠나기 때문에, 우슈토베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카자흐스탄 여행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아쉬운 마음 저편에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고 있다. 집중이 곧 나다 우슈토베에서 이틀 동안 있었지만, 이곳은 한국의 외진 시골 같은 느낌이다. 자본이 미처 이르지 못한, 그래서 과거를 그대로 간직한 곳처럼 느껴졌다. 어제 보았던 밤하늘은 ‘늘 있지만 볼 수 없던 것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줬다. 앞만 보고 달려왔거나,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대하며 살아온 사람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놓친다는 건, 어찌 보면 정말 ‘놓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덜 신경 ..
60. 대화 속에 우리들은 자란다 지순옥 할머니를 통해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슈토베로 강제이주하게 된 과정, 그리고 우슈토베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데엔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세계 곳곳에 이렇게 흩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고도 또 죄송하기만 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틀이 아닌, ‘우리 모두 어리숙하다’는 틀로 사건이 끊이지 않는 단재친구들. 물론 이건 비아냥이 아니다. 삶의 배경이 다르고, 욕망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활동을 하다 보니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억압된 사회이거나 죽은 사회일 것이..
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下 할머니의 성함은 지순옥으로 연세는 92세라고 했다. 1937년에 원동遠東(머나먼 동쪽)의 쁘리모르스키끄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에 살고 계셨단다. 남자들은 강제이주 전에 이미 잡혀갔기 때문에, 이 당시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으로 가라는 교사의 지시가 있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기차를 탔다고 한다. ▲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까지는 고려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직접 만나고 나선 그 무지에 깜짝 놀랐다. 설국열차를 방불케하는 생존의 현장 기차는 화물칸으로 120명가량의 사람이 탔는데, 자신의 엄마는 열흘 정도 먹을 것을 가지고 탄 반면, 아무 것도 없이 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58.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上 오후에는 고려인 초기 정착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뵈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뵐 때마다 느껴지던 감정이 지순옥 할머니를 뵈었을 때에도 느껴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지만, 고려인의 이야기도 우리의 아픈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역사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 ▲ 1000회가 넘게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수요집회(출처- 경향신문) 너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하지만 나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팩트fact라기보다 픽션fiction이며, 현재의 이야기이기보다 ‘과거에 그랬더라’라는 옛날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제 초기 정착지 근처의 무덤을 둘러보며, 누군..
57. 기독교인에게 배운 진정성 관계를 맺고 끊으며,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일련의 일들이 삶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 관계를 맺고 끊을 것인지,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하며 어떤 일에 대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떤 경우’와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판단 기준이 있으려면, 진정성 있게 삶을 대하고 있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 재미교포 친구들의 발표회를 보러 온 아이들. 기독교는 고려인에게 힘을 주다 여긴 감리교 연합회 소속의 교회다. 종교가 때론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 더욱이 고려인들은 이국의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온갖 핍박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필요한 건, 위로였다. 그래서 ..
56. 한국과는 다른 카자흐스탄 집의 특징 우슈토베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여긴 종교시설이다보니, 카자흐스탄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선교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도 들더라. 하룻밤만 묵는 곳이었고 꽤 낡은 시설이었지만 맘에 들었다. 전통 가옥까지는 아니어도 한국과는 다른 가옥형태이기에 카자흐스탄에 온 기분을 만끽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홈스테이를 했거나 카자흐스탄 집을 여러 곳 들러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집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세 곳을 옮겨 다니며, 여러 집을 들러본 결과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었다. 그게 한국의 집과는 다른 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눈에 띄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카자흐스탄 집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 전통가옥에서 그래도 포근하게 잤다. 신발을 어..
55. 너의 불행이 나에겐 안도감이 아니길 그 다음으로 간 곳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내린 역인 우슈토베역이었다. 역주변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1937년 당시엔 허허벌판에 가까웠다고 했다. 우슈토베역, 너의 아픔이 나의 안도가 아니길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역이, 고려인들이 당시에 보았던 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막막함과 서글픔이 밀려오더라.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냐?’라는 울분 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참상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서 이야기를 듣듯, 남의 일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용산참사’가 났을 때,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남의 일’처럼 들렸고 ‘그들의 일’처럼 들려 ‘안 됐다..
54. 강제 이주와 고려인 고려인들은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지방에 있는 항만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 시킨 것이다. 왜 고려인을 강제이주 시켰는지에 대해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고 한다. ▲ 바슈토베의 초기 정착지. 이곳에 남은 치열한 흔적들. 스탈린이 고려인을 강제 이주한 까닭 그 하나의 카자흐스탄 민족은 유목민으로 양을 키우며 양고기나 먹고 살던 때라, 정착민인 고려인을 보내 불모지를 초원으로 개간하기 위해 보냈다는 것이다. 이 의견이 성립되려면 소련 사람에게 ‘고려인은 농경에 능한 민족’이란 관념이 있어야 하고, 선진 농법을 전파하고 싶었다면 최소한의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보냈어야 한다. 그런데 죽던 말던 상관없다는 듯이 그냥 보내버리기에만 급급했던 ..
53. 난 조선인이요, 난 고려인이다 밥을 먹고 본격적으로 고려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떠났다. ▲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에 가는 길. 고려인은 배신자? 아스타나에서 알마티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같이 갔던 교육원 선생님에게 전혀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한 분은 기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고, 다른 한 분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고려인이 한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하거나, 취업을 하려 하면 한국의 나이 드신 분들이 “배신자!”라며 공격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어낸 동포이며 동변상련을 함께 해온 동지로 생각하여 반길 거라 짐작했는데, 반기긴 커녕 욕을 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보고 있으니, 임난 당시 인조가 병자호란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내빼고 항복한 후에 조선 땅에..
52. 총각김치와 노자 탈디쿠르간에서 1시간여를 달려 우슈토베ushtobe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고 이동할 때만 해도 우슈토베에 있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아이들과 함께 머물며 우슈토베에서 고려인 발자취를 따라가며 카자흐스탄의 마지막 1주일을 보내는 줄만 알고 있었다. ▲ 우슈토베엔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다른 장소, 새로운 인연 그런데 그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종교시설이었다. 감리회 소속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로 우리가 도착했을 땐 재미교포 학생들이 여름성경학교에 와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교회에 마련된 숙소가 아닌,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별채에서 자야 한단다. 별채는 민가를 개조한 곳이어서 아늑한 느낌이 났다. 이런 건물을 러시아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