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와 그노시스
네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간이 하나님인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은, 인간을 하나님과 동차원에서 바라볼 수 없는 비열한 존재로 파악하거나, 인간에게 부분적인 신성의 족보를 허락하거나, 인간에게 완벽한 신성을 부여하거나, 이 세 가지로 요약될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정답일까? 물론 정답은 없다. 시·공의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끊임없는 해석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를 끊임없이 개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도마복음서와 같은 코우덱스에 들어있는 도마서(The Book of Thomas)에는 예수가 그의 쌍둥이 도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나와 일상적으로 걷고 있을 때는 비록 깊은 이해를 결하고 있지만, 너는 이미 앎을 획득하였도다. 그래서 너는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자’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를 아는 자는 이미 우주의 심오한 진리를 획득하는도다” (138, 14~19).
도마복음서의 논리가 좀 더 번잡하게 발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도마서는 변자도마서(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라고도 불리는데 예수와 쌍둥이 도마가 둘이서 변론하는 것을 마타이아스(사도 마태?)가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변자도마서도 도마복음서의 추구와 발견, 그리고 지배와 휴식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도마복음서보다 후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도마행전에는 선행한다. 도마복음서의 내용을 다양하게 편집하면서 발전시킨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초기기독교운동이 끊임없이 새로운 텍스트들을 요구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상기의 논리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강조되었다. 자기에 대한 앎(Self-Knowledge)이야말로 지식의 전부이며, 그 앎이 곧 전 우주의 심오한 진리라는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는 좀 수수께끼 같은 구문이다. 그러나 ‘안다 - 알려진다’의 문장 패턴은 바울서한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서한 중에서도 저작성이 가장 확실한 갈라디아서에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상속자니라. 전에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신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 (now that you have come to know God, or rather to be known by God)”(갈 4:7~9).
고린도전서에도 이와 같이 쓰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그 유명한 바울의 사랑장에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 우르파박물관의 뜨락에서 초기 도마기독교 교회의 한 부분인 듯이 보이는 조각을 찾아냈다(AD 2세기). 현재 우르파에는 단위면적당 고색창연한 모스크가 제일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모두 기독교 교회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사자 머리 위로 십자가가 있고 돔 옆으로는 새끼양이 새겨져 있으며 기둥은 코린트양식이다. 세례성소의 조각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도마복음의 ‘알려진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알려진다’는 것을 뜻함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 알려지는 조건이 무엇인가? 바로 너 자신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도마와 바울은 크게 갈린다.
바울은 하나님께 알려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의 아들인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랑이란 암암리 지식, 즉 그노시스를 경계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그치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지식 즉 그노시스는 사람을 자고(自高)케 만든다는 것이다. 너무 인간이란 존재에게 본질적인 자만심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인간의 자기탐구에 대하여 한계를 지으려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알려지는 진정한 길은 인격화된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철저히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알 때만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덕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내가 나에게 왕이 된다는 뜻이다.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여기서 논리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을 선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유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케 만드는 지혜로운 스승일 뿐이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매우 미묘한 입장을 취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평범한 인간도 모두 하나님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아들이 된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이 두 사태가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또 내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는 것은 결국 나와 하나님의 궁극적 합일(合一)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요 10:14~15).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러한 요한복음의 상호내재(mutual indwelling)의 언사도 결국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이 하나로 합일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발전은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울도 유대화파나 영지주의적 온갖 분파와의 싸움에서, 확고한 자기의 헬라적 이념체계와 그것에 기초한 교회 공동체조직에 모든 것을 복속시켜야 했기에, 평범한 인간에게 그리스도와 동등한 신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울신학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유대인의 민족적 체험의 배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들’은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이었고, 그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 확대시키기 위하여 부활사건을 도입한 것이다.
도마복음은 이와 같이 확언한다: “네가 네 스스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아니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가 되고 말 뿐이다!” 여기 ‘너(you)’가 단수라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너의 대답은 무엇이냐? AD 1세기의 초기기독교세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아무런 금기 없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 팔미라의 영웅, 기번이 이 지구상에 여성으로서 태어난 가장 영웅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극찬한 제노비아는 용전(勇戰)을 거듭했으나 결국 로마로 잡혀가고 말았다(AD 272), 제노비아는 바로 예수가 썼던 아람어를 말한 여인이었다. 제노비아는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곡기를 끊고 죽었다, 제노비아는 클레오파트라를 숭배했고, 죽음도 클레오파트라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그녀의 영웅적 패배로부터 팔미라는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팔미라는 모래와 티끌 속에 묻혀 있었다가 1678년에나 알렙포에 살았던 두 영국 상인에 의하여 재발굴되기에 이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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