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발전?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제 그에 걸맞은 통치 기구가 필요했다. 인도에 영국식 관료 행정 기구를 이식하는 작업은 벵골을 식민지화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부패와 착취만을 일삼은 동인도회사의 짧은 통치 경험은 영국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1772년 동인도회사의 벵골 지사로 파견되었다가 운 좋게도 정부의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느닷없이 총독(벵골 총독)으로 신분이 상승한 헤이스팅스와 그 후임 총독인 콘월리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두 총독이 지배하던 시기에 벵골의 식민지 행정은 확고한 골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전 인도 지배에도 관철된다.
벵골에서 영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리들의 급료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동인도회사 시절에는 직원들이 ‘알아서’ 급료를 해결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부패와 불법 행위가 극심했다. 이제 인도를 지배하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정부였고, 그 우두머리부터 정부의 녹을 받는 공무원이 되었으니 부하들도 그래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관료제의 윤곽을 갖춘 뒤에는 치안 유지가 과제였다. 그전까지 인도에서는 각 지역에 자리 잡은 자민다르(zamindar)라는 지주들이 사병 조직을 운영하면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자민다르는 말 그대로 ‘토지(zamin) 소유자(dar)’라는 뜻이지만, 전통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토지를 소작으로 내주고 지세를 받았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를 가리키기도 했다. 치안을 담당한 것도 여기서 유래된 역할이다. 그 역할이 중지된 이후에도 자민다르는 영국 정부로부터 특권층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식민지 총독부는 이 사병 조직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공적인 경찰 기구를 설치했다.
그러나 영국이 행정 기구를 개편한 것은 인도 진출의 동기였던 경제적 이익을 착취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동인도회사에서 정부로 관리 주체가 바뀌었다 해도 영국의 그 기본 의도는 항상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 총독부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구는 세무국과 상무국이었다. 상무국이 예전의 동인도회사와 같은 역할을 대신했다면, 세무국은 식민지로 탈바꿈한 인도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이득, 즉 세 수입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영국은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에서 얻는 이익도 거두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세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세 대상이 근대화되어야 했다(앞서 중국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양세법兩稅法이나 일조편법一條鞭法 같은 세제 개혁은 모두 과세 대상을 표준화한다는 게 기본 취지였다). 이를 위해 벵골의 식민지 총독부는 기존의 자민다르가 소유한 토지를 경매 입찰에 부쳤다. 말하자면 가장 많은 세금을 내겠다는 사람에게 토지를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차적으로 세수를 계산 가능하게 만든 다음에는 세제를 더욱 단순화시키는 수단으로 1793년부터 영구 정액제를 실시했다. 해당 토지에 한 번 정해진 세금은 이후 언제까지나 정액으로 고정된다는 의미다. 이 조치에 따르면 자민다르가 자신의 소유지 내의 토지를 개간해 새로 얻는 소득은 모두 그가 차지하게 되므로 기업가적 정신을 지닌 근대적인 지주상이 확립될 수 있었다(하지만 당시 식민지 총독부는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겠다고 나선 게 아니라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대단히 복잡해진 인도의 세금 제도를 단순화해 관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개혁을 실시한 것이었다. 결국 서구적 근대화의 요체는 단순화와 계량화에 있다).
벵골에서 정해진 행정의 기본 방침은 영국이 인도 전역을 통일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벵골 총독은 인도 총독으로 격상되었으며, 각 지방마다 영국식 입법부와 사법부가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인도는 식민지 지배를 받는 입장이기는 해도 서서히 근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 인도 총독들 인도가 우리의 식민지 역사와 다른 점은 영국에서 부임해온 인도 총독들이 일본의 조선 총독들에 비해 훨씬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해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한 데 비해, 영국은 인도에서 경제적 이득을 보는 데 만족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와 일반 제국주의의 차이다. 식민지적 지배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콘월리스(왼쪽)와 벤팅크(오른쪽)는 인도의 근대화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근대화를 추진하는 주체가 영국이었으므로 ‘영국화’도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다. 초대 인도 총독인 벤팅크(william Bentinck, 1774~1839)의 통치는 근대화와 영국화의 양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여러 가지 복지 정책을 실시했고, 인도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해 승진도 가능하게 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는 사티(sati)와 같은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관습도 뜯어고쳤다. 여기까지가 근대화라면 영국화의 사례는 영어 교육 시행령이다. 인도에 영어 교육을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10년간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끝에(이슬람 세력이 주로 반대했고, 힌두교 세력이 지지했다) 1835년에 벤팅크는 영어 교육을 채택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뒤부터 인도인들은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영국인처럼 변했고,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영국은 자연스럽게 인도를 정신적으로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근대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분열기, 그리고 분열기마다 되풀이된 전란과 약탈은 사라졌고, 국내의 치안과 질서도 크게 안정되었다. 농민들은, 생활이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근대적인 법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적어도 예전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지주들의 지배로부터는 벗어났다【이런 ‘문화 통치’가 연착륙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인도에서는 오늘날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게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인도인들끼리 대화할 때 영어를 쓰지 않으면 교양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는 과거의 지배자인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도 영국연방에 속해 있다. 일본도 한반도를 지배할 때 일본어를 사용하게 했는데, 영국과 달리 일본은 일본어 교육을 도입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아예 식민지의 말과 글을 금지했다】.
▲ 사티 사티는 인도인들이 따르던 고대의 『마누 법전』에도 명시되지 않은 악습이었다. 그림은 사티 관습에 따라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르려는 여인을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인도 총독 벤텅크는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사티를 법으로 금지했다.
그렇다면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오히려 발전을 이룬 걸까? 이것을 이른바 식민지적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남의 나라에 주권을 넘겨주고 나서 달라진 것을 발전이라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인도는 애초부터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다(지금까지 우리는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인도를 마치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취급했지만, 사실 인도는 나라라기보다는 한 지역, 아대륙의 명칭이다).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인도는 역사적으로 통일기보다 분열기가 압도적으로 길고 많았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비정상적이었으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통일이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인도는 ‘주권’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었으므로(나라가 아닌 대륙, 문명권에 주권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으니까) 영국에 주권을 넘겨준 게 아니었다.
3500여 년 전에 인도로 들어온 아리아인, 2000년 전의 쿠샨족,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인도를 장악한 델리 술탄, 아프가니스탄과 터키의 이슬람 세력, 그리고 무굴 제국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지배했던 역대 왕조들은 대부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민족들이었다. 어떤 면에서 인도의 역사는 인도라는 넓은 지역을 무대로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민족이 번갈아 주인공으로 출연한 변화무쌍한 ‘이민족의 드라마’였다. 그 과정에서 일관된 인도의 모습은 힌두교라는 종교로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희석되고 혼합되었다.
통일된 중심이 없으므로 인도에서는 분열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지배가 순조로이 먹혀든 것이었다. 사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을 영국 제국주의의 일관된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이 점에서도 영국의 인도 정복은 일본의 한반도 정복과 크게 다르다). 영국은 프랑스, 인도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 대해서 내내 소극적인 태도였으며, 오히려 인도가 평화로워져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기 좋은 환경이 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벵골을 차지한 뒤부터 영국은 원하든 원치 않는 인도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인도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탈을 겪었으나 서양 세력의 지배는 처음이었다. ‘서방의 이민족’은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어차피 인도의 역사는 이민족을 수용하는 역사였다. 강력한 중심을 향해 주변 세력이 결집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변 약소 왕국들이 동인도회사에 접근했고 자신들 간의 내분에도 영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을 반민족 행위라든가 매국노의 짓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인도를 단일민족의 관점에서 잘못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국은 단지 과거에 인도 역사에 등장했던 큰 제국들이 수행한 역할을 했을 뿐이며, 당시 인도인들로서도 거의 그렇게 받아들였다고 보면 된다.
▲ 식민지의 흔적 이 건물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져 1911년 인도의 수도가 델리로 옮겨갈 때까지 근 100년이나 총독 관저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수도 뉴델리는 델리로 수도를 옮긴 뒤 그 남쪽에 20년 동안 건설하여 완공한 신도시다. 서울의 조선총독부는 1995년에 헐렸지만 이 건물은 현재도 서벵골의 주지사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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