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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간디와 인도 독립: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간디와 인도 독립: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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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애초부터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을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 실시된 유화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1880년대 영국에서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의 자유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정점에 달한 유화책은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반동으로 돌아섰다. 급기야 영국은 인도의 영토마저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03년 영국은 행정을 개선하다는 명목으로 벵골을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벵골은 캘커타가 중심이고, 동벵골은 아삼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중심이었다. 인종도 벵골인으로 같고 언어도 벵골어로 같은 데다 특별한 지리적 경계선마저도 없는 지역을 왜 굳이 둘로 나누었을까? 서벵골은 힌두교권이었고 동벵골은 이슬람교권이었다는 점을 알면 영국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은 종교를 핑계로 벵골을 분리함으로써 인도인의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분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제 인도에서도 민족의식이 싹튼 지 50여 년이나 지났으므로 인도인들도 예전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인도국민회의라는 민족적 단체를 결성한 터였다. 국민회의는 1885년에 영국의 관변 단체로 출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 운동을 이끄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벵골 분리 계획은 즉각 국민회의를 비롯해 인도인 전체의 국민적 반발을 샀다. 인도인들은 스와데시(Swadeshi) 운동으로 맞섰다. 인도 국산

품을 애용하고 영국 상품을 배격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절정에 달한 1905년에는 외제 옷을 입고서 감히 거리에 나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결국 영국은 국왕 조지 5(George V, 1865~1936)가 인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벵골 분리 계획을 정식으로 취소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했다(그러나 벵골 분리 계획은 장차 방글라데시의 분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뒤 한동안 영국과 인도는 그럭저럭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바깥에서 그 관계를 재정립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태가 터졌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인도에 지원과 지지를 요청했다. 도움을 받으면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 영국이 제시한 대가는 인도의 스와라지(Swaraj, 자치)였다.

 

 

세계대전에 참전한 인도군 유럽 전선에 투입된 인도군의 모습이다.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인도는 자치를 얻는 조건으로 영국의 요구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인도는 모두 14만 명의 병력을 유럽 전선에 파견했으나 영국은 자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때마침 국제사회에서는 윌슨(Woodrwo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약소민족의 자결권 보장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를 비롯한 당시 지도자들은 영국의 약속을 믿고 130만 명의 용병을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에 자원군으로 보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인도 장관 몬터규(Edwin Samuel Montagu, 1879~1924)의 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인도인들은 이제야 진정한 자치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인도인들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종전 직후인 1919년에 공포된 인도통치법에는 도저히 자치라고 부를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국은 납세자만이 선거권을 가진다는 서구적 원리를 악용해 인도인(그것도 남성)10퍼센트에게만 참정권을 허용한 것이다. 더구나 약속한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무시되었다. 영국은 전보다 더욱 강경한 방침으로 돌아섰다.

 

오로지 자치 하나만 믿고 막대한 전쟁 지원금까지 부담한 인도인들은 잠시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남이 내 나라를 독립시켜줄 수는 없는 일, 그들은 다시 반영운동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영국에 대해 대대적인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흔히 비폭력운동이라 알려져 있어 마치 소극적인 저항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이 운동은 영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말고 납세마저도 거부하자는 적극적인 운동이다.

 

당황한 영국은 전통적인 분리책을 추구하면서 이슬람 연맹을 회유하려 했으나, 이것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이미 인도인의 저항은 종교를 넘어선 거국적인 규모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슬람 세력과 간디는 그 일을 계기로 서로 협력을 취하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힐라파트(Khilafat) 운동이다.

 

인도판 국공합작이라고 할 만한 힐라파트 운동이 끝까지 지속되었다면 오늘날의 파키스탄은 없었을 것이다. 인도의 전 역사를 통틀어 통일을 저해하는 고질병이던 종교상의 차이는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최소로 좁혀들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중국의 국공합작을 가로막은,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는 현상은 인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합작을 깼다면 인도에서는 국민회의가 그 역할을 맡았다. 1937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국민회의는 혼자 힘만으로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자 이슬람과의 합작을 거부해버렸다. 이슬람 측에서 보면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이것을 계기로 힐라파트 운동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힐라파트 운동은 원래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들이 패전한 오스만튀르크(터키)해체하려 했을 때 위기를 느낀 이슬람 교도들이 칼리프를 지키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이 운동을 지원하는 대신 이슬람 세력이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지원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 회의가 배신하자 실망한 인도의 이슬람교도 수만 명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집단 이주했고, 또 힌두교도들은 그들의 과격한 행동에 분노하는 바람에 양측은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갈라설 명분만 노리고 있던 이슬람 측에 구실을 준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다시 영국은 인도의 협조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지난번에 골치 아픈 일을 겪은 탓인지 이번에는 협조를 요청하기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인도를 연합국 측으로 등록시키고 인도의 이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약속 위반을 괘씸하게 여긴 인도인들은 격분했다. 국민회의는 즉각 협조를 거부하고 모든 각료가 사퇴해버렸다. 그런데 이 정치 공백이 엉뚱하게도 이슬람 연맹 측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힐라파트 운동에서 힌두 세력이 배신했다면 이번에는 이슬람 세력이 배신할 차례다. 이슬람 연맹의 지도자인 진나(Mohammed Ali Jinnah, 1876~1948)는 재빨리 파키스탄이라는 새 국가를 수립하고 영국에 파키스탄을 승인해준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했다파키스탄(Pakistan)은 만들어진 과정도 그렇지만, 나라 이름도 전통적인 지역의 이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다분히 인위적이다. 즉 펀자브(p), 아프간(a), 카슈미르(k), 신드(S) -모두 지명이다-의 나라(stan)라는 뜻이다. 원래는 1933년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인도의 이슬람교 학생들이 처음 만든 용어였다. 때마침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이 인도를 위협하자, 간디는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난다면 자신들이 직접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우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영국은 둘 중 협조하겠다고 나선 이슬람 연맹 측에 접근했다.

 

이제 두 가지 대세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으로서는 인도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로서는 파키스탄의 분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가시화될 무렵인 1944년 간디는 진나와 회담을 갖고 독립이 먼저라고 주장했으나 진나는 분리가 먼저라고 맞섰다(이것도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진 과정과 비슷하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국민회의에서 간디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었고, 새 지도자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는 분리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7815, 인도는 마침내 200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의 승리였다. 독립과 동시에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한 몸이었던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 인도에서는 네루가 초대 총리에 올랐고, 파키스탄에서는 진나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인도 통일의 마지막 보루였던 간디가 암살됨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민족 지도자 간디 간디는 폭력보다도 강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의 지배에 맞섰다. 하지만 그는 조국이 200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해방되자마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동시에 온 분열을 막으려 애쓴 점에서, 그리고 그 와중에 반대파의 총에 암살되었다는 점에서 간디는 우리의 민족 지도자 김구와 비슷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민족의식에 눈뜨다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인도에서 종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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