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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간디와 인도 독립: 민족의식에 눈뜨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간디와 인도 독립: 민족의식에 눈뜨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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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간디와 인도 독립

 

 

민족의식에 눈뜨다

 

근대화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식민지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로 끌어올린 동시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아동 노동으로 악명을 날리게 했다. 주체적 근대화를 이룬 서구세계에서도 그럴진대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을 거친 인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근대적인 지세 제도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전통적 관계는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토지 소유자가 자기 재산에 해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낸다는 원칙은 영국에서 보면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근대적인 토지 소유 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전통의 지주들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엇보다 사유지에 대한 관념이 미약하다. 그냥 이 언덕에서부터 저 강변까지가 내 땅인 것이지, 내 땅의 정확한 경계선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영국은 우선 토지 조사를 실시해 토지에 관한 제반 사항과 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지주가 자신의 소유권을 서류로 제출하지 못하는 토지는 가차 없이 경매 입찰에 부쳤다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1910년대 일본도 한반도 토지 조사 사업에서 그랬다. 일본은 가혹한 식민지 수탈로 일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토지 소유 관계를 일체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왕조시대까지 한반도에는 왕토 사상에 따라 토지를 사유하는 제도가 없었는데, 일본은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전통적인 소유(이 언덕에서 저 강변까지)를 인정해도 정밀한 측량으로 거기서 누락되는 공지가 생기게 마련이므로, 일본은 그 땅을 국유화해 일본의 이주민들에게 값싸게 팔아넘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중소 지주들이 몰락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고 자영농이 성장한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기생 지주들이 등장해 그 자리를 메워 버린 것이다. 그 조치 때문에 희생된 것은 오히려 인도의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와 향촌 지배 양식이었다. 때마침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공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한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인도는 식민지의 1단계 영국의 원료 공급지)2단계(세금 수탈지)를 거쳐 3단계인 자본주의적 시장으로서 역할하게 되며, 마침내 어느 지식인의 입에서 셰익스피어와 견줄 수 있는 국보로 간주된다(토머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 영국 상품의 주요 소비자들이 바로 신흥 지주들이다.

 

근대화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비로소 인도에도 근대적인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영국이 인도에 베푼 가장 큰 공헌은 근대화의 빛이 아니라 바로 그늘에서 자란 민족의식일 것이다. 그로 인해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반란이 부쩍 잦아졌다. 그 정점은 1857년에 터진 세포이(sepoy)의 반란이다.

 

세포이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가리키는 말인데, 벵골군의 절반가량이나 차지했다. 세포이들은 그전부터 군대 내에서도 통용되는 카스트 관습 때문에 영국 측과 마찰이 있었고, 대우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또한 그들은 영국이 오우드 문제를 처리한 방식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세포이의 3분의 1은 오우드 출신이었는데, 당시 영국은 오우드를 강제 병합하여 폭정을 펼쳤다).

 

 

용병들의 애국심 세포이의 반란에는 인도의 시민과 농민 들만이 아니라 봉건지주층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 사건은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각시켰기 때문에 인도 역사상 최초의 독립 전쟁으로 간주된다. 독립운동의 첫 테이프를 하필 영국에 고용된 용병들이 끊었다는 점이 공교롭다.

 

 

반란의 계기는 사소한 데서 터져 나왔다. 바로 총기 소제용 헝겊이 문제였다. 병사들은 이것을 대개 입으로 물고 적당히 찢어내 총기를 닦았는데, 이 헝겊에 칠해진 기름이 쇠기름과 돼지기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이고,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 가뜩이나 영국이 카스트의 관습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세포이들은 영국이 자신들을 모독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더구나 영국군 장교들은 그런 소문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그 헝겊을 사용하라고 강요했다. 때마침 영국이 인도를 아예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세계 대다수 나라에서 종교는 단지 신앙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다).

 

18575, 참다못한 벵골의 세포이들이 먼저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봉기는 순식간에 벵골에서 오우드의 러크나우와 칸푸르 등지로 퍼졌으며, 이내 전국적인 반영운동으로 이어졌다. 세포이들은 그때까지 명맥이 붙어 있던 무굴 제국의 황제를 내세우고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상징에 불과한 무굴 황제가 세력 결집의 실제 우두머리가 될 수는 없었다. 반란이 일어난 후 1년간 세포이들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제법 세력을 떨쳤으나 그 뒤부터는 지리멸렬한 끝에 진압되고 말았다.

 

세포이의 반란으로 인해 인도에서는 두 가지가 사라졌다. 먼저 그동안 과소평가해온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게 된 영국은 인도인의 상징적 중심인 무굴 제국을 없애버렸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영국의 진출 이후 100년 간 굴욕에 찬 명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또한 동인도회사가 사라졌다. 벵골을 장악한 이후 동인도회사는 영국 정부의 명령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인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더 이상 회사 체제로 식민지를 지배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동인도회사를 해체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사라졌으니 이제 인도는 총독 정도로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내각에 인도 담당 장관을 두고, 인도에 총독이 아닌 부왕(副王)을 파견하게 되었다. 부왕이 있다면 그 상급의 왕, 즉 황제도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굴까? 바로 영국 국왕이다. 그리하여 1876년 영국 여왕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는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되었으며, 인도는 인도 제국으로 격상되었다(왕국이 제국을 거느린 격이지만 중세 신성 로마 제국과 여러 왕국의 관계에서 보듯이 원래 서양의 역사에서는 제국과 왕국이 수직적 질서를 맺지 않는다). 제국에 걸맞게 영국은 인도에 대해 유화정책으로 돌아서 인도의 관습과 전통적인 제도, 종교 등을 존중하고 인도인에게 차별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세포이의 반란으로 싹튼 민족의식의 불씨는 괴뢰 제국을 세운다고 해서, 혹은 유화책으로 조금 더 나은 대우를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영국군의 대량 학살과 잔혹 행위는 인도인들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증오의 씨앗을 남겼다.

 

 

초대 부왕 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영국은 그간 말썽이 많았던 동인도회사를 없애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총독 대신 부왕이 파견되었는데, 사진은 초대 부왕으로 임명된 캐닝(Charles Canning)이다. 그러나 부왕은 직책에 불과할 뿐 실제로 인도를 다스린 것은 여전히 총독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민족의식에 눈뜨다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인도에서 종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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