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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4장 - 어른과 아이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4장 - 어른과 아이

건방진방랑자 2023. 3. 1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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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과 아이

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는 안식일의 아이다. 그 아이는 창조된 천지의 모든 것을 구유(具有)한 생명이지만 어른의 탐욕과 권세와 강성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원초성이다. ‘어른아이는 객관화되는 개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Self)에 내재하는 일종의 아키타입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어른쪽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 항상 아이쪽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3절의 하나된 자에 관한 올바른 해석을 내리게 되면, 우리는 이제 4장의 전체적 의미를 해독하는 결정적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이 영지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틀에 따라 타출전과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세부적으로 구문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고전의 해석이란 어디까지나 보편적 인간(Universal Man)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시대적 가치관이나 특수한 상징성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기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의 삶의 의미를 우리는 끊임없이 캐물어야 한다.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러한 언어를 구성하여 타인에게, 후대에게 전달하려 했을까? 여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이 먹은 어른(the man old in days)’칠일 갓난 작은 아이(a small child seven days old)’의 대비이다.

 

나이 먹은 어른이란 많은 날을 산 사람이다(old in days). 우리 통념의 세계에서는 나이 먹은 어른이란 지혜롭고, 인생의 길에 관하여 어린이보다 더 경험이 풍부하고 통찰력이 있다고 전제된다. 그리하여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란, 어린이는 어른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하며, 어린이는 어른에게 인생의 지혜에 관하여 가르침을 얻어야 하며, 묻기만 하고 함부로 말대꾸를 해서는 아니 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복종하고 잘 따르기만 하면 착하다 칭함을 얻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위대성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의 통념적 가치관을 전도(轉倒, Inversion)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전도가 없으면 발견은 일어나지 않는다. 추구와 발견의 대상은 천국(나라)이다.

 

 

니므롯 성채에 앉아있는 쌍둥이(디두모), 아버지는 산리우르파의 청년 메흐메트 알리(Mehmet Alli), 아이티 산업에 종사한다고 했다. 나보고 자기집에 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조른다. 그들은 아직도 이토록 풍요로운 인심 속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우리의 일상적 가치를 전도시키는 데서 등장하는 신천지인 것이다. 노자55을 한번 펼쳐보자! 놀라웁게도 우리는 도마복음 제4장의 다른 버전을 발견하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덕을 머금음이 도타운 것은 갓난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含德之厚, 比於赤子.
벌이나 뱀도 그를 쏘지 않고 蠆虺蛇不螫,
맹수도 그에게 덤비지 않고 猛獸不據,
날새도 그를 채지 않는다. 攫鳥不搏.

 

뼈가 여리고 근이 하늘한데도 꼭 움켜쥐면 빼기 어려우며, 骨弱筋柔而握固,
암수의 교합을 알 까닭이 없는데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로지게 꼴린다. 未知牝牡之合而全作,
정기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精之至也.
매일 하루가 다 하도록 울어 제키는데 그 목이 쉬질 않는다. 終日號而不嗄,
조화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和之至也.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항상성이라 하고, 知和曰常,
항상성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知常曰明,
삶에 늙음을 덧붙이는 것을 요상함이라고 한다. 益生曰祥,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心使氣曰强.
사물은 강장하면 곧 늙어버리는 것이니, 物壯則老,
이를 일컬어 도()답지 않다고 한다. 謂之不道,
도답지 않으면 일찍 사라질 뿐이다. 不道早已.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는 표현은 그냥 갓난 애기라는 사실적 사태가 아니다. 카를 융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내 몸속에 내재하는 아키타입으로서 말했듯이, 여기 어른아이또한 내 몸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아키타입을 지칭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의 모든 언어는 상징체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생후 제8일에 할례를 받는다(17:12), 따라서 칠일 갓난 아이는 할례라는 문명관습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의 순결한 혼돈상태를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유대인의 습관 속에서 나온 이미지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야훼 하나님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 창조가 6일만에 완성된 것이다.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는 것은 안식일의 아이(a child of the sabbath). 즉 천지의 온전한 모습이 다 구유된, 다 완성된 아이인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정기의 지극함[精之至]과 조화의 지극함[和之至]이 구유된 존재인 것이다. 나는 의과대학에서 소아과학(pediatrics)을 공부할 때 교과서 첫 페이지를 펴보고 거기에 쓰여져 있는 첫 문장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 아이는 어른의 작은 형태가 아니다(A child is not a small adult).”

 

도마복음의 살아있는 예수 말씀의 가장 신랄한 메시지는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the place of life)에 관하여 묻는 것을 주저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삶의 자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동일한 표현이 도마복음서 내에도, 또 다른 출전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맥락상 그 의미는 절로 명백해진다.

 

도마복음 58에 이런 예수의 말씀이 있다: “수고하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로다.” 여기 수고함이란, ‘추구하고 발견하는고통스러운 과정을 말한다. 실제로 육체적 노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삶의 길, 즉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노력 없이 생명은 얻어지지 않는다.

 

삶의 자리란 곧 삶이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그러나 그 마당은 항상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의 역정이란 삶의 자리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다. 우리가 어디를 간다는 것도 결국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삶의 자리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의 자리를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자리 그 자체를 항상 어린이다웁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삶에 늙음을 덧붙이는 것은 요상함이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은 강함이다. 그러나 사물은 강하면 곧 늙어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도답지 않다고 한다. 도답지 않다, 즉 부도(不道)란 예수에게 있어서는, 천국의 도래를 거부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공자(孔子)도 항상 제자 안회(顔回)가 자기를 계발시킨다고 기뻐했다. 공자도 삶의 자리를 항상 어린이다웁게 만들어 간 사람이었던 것이다.

 

 

2008729일부터 831일까지 새문안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좋은 전시가 열렸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 서안(西安) 비림(碑林)의 장대한 비석(탁본)들이 전시되었다. 돌처럼 정확하게 역사를 전하는 문화매체는 없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중앙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대진이란 로마제국이다. ‘경교란 기독교를 가리킨다.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인데 당나라 건중 2(781)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이미 우리나라 통일신라 불국사가 완성되었을 즈음 중원에서 유행하고 있었고 비의 내용으로 보아 당나라 때 신약성서 27 서가 이미 한문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교431년 에베소 공회에서 파문당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일파의 기독교인데 그는 예수의 인성을 100%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리우스의 부활로서 오인된 것이다. 경교는 도마복음서의 전통을 보지(保持)하고 있던 에데사왕국에서 보호를 받고 페르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온 것이다. 당태종은 황당한 기적이나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을 말하지 않는 기독교를 현묘무위(玄妙無爲)하고 제물리인(濟物利人)하므로 천하에 행하여질 만하다고 하였다. 한국사람이라면 이런 전시를 더 선호해야 하지 않을까? 시원찮은 루브르박물관 부스러기보다는 우리에게 더 의미있는 전시가 아닐까? 오른쪽 탁본은 당현종 친필 효경, 왼쪽은 왕필 주 주역개성석경, 사진 속 관람 어린이, 지윤과 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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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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