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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술이 제칠 - 1. 전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술이 제칠 - 1. 전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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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7-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전해 내려오는 것을 술()하였으되 새로 창작하지는 않았다. 나는 옛것을 신험하였고, 좋아하였다. 나를 슬며시 노팽(老彭)에 견주노라.”
7-1.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선진문헌에서 ()’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문명의 질서를 최초로 창조한다는 의미가 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서구 신화학에서 말하는 컬츄럴 히어로우즈(cultural heros)’, 혹은 컬쳐 브링어즈(culture-bringers)‘, 그러니까 문명의 최초의 전기를 만든 신이나 영웅들의 창작행위를 지칭한다.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는 최초로 올리브 나무를 심었고, 아테나 에르가네(Athena Ergane)는 최초로 직조기술을 발명하여 천을 만들었다. 데메테르(Demeter)는 농경을, 디오니수스(Dionysus)는 포도 재배(viticulture), 아폴로(Apollo)는 역법(曆法), 아르고스의 영웅 포로 네우스(Argive Phoroneus)는 불을 발명했고, 로데스섬의 영웅 텔키네스(Rhodian Telchines)는 제철기술을, 범헬라의 영웅 헤라클레스(Heracles)는 올림픽게임을, 아테네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온갖 생활기술들(technai)을 발명했다.

 

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첫머리에는 사람들이 벌레ㆍ독충ㆍ맹수 속에서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지반을 올리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짓는 법을 발명한 유소 씨(有巢氏), 그리고 날음식만 먹다가 복통ㆍ설사가 나고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불을 발명하여 화식()을 시작케 한 수인씨(燧人氏), 황하의 범람으로 농작이 망치게 되자 관개시설의 발상을 한 곤()ㆍ우()의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모두 컬쳐 브링어즈의 이야기인 것이다. 복희(伏羲)씨도 사람들에 전어목축(佃漁牧畜)을 가르쳤고, 희생(犧牲)을 길러 포주(庖廚)에 충당케 한 영웅이라서 포희(庖羲)라고 한다. 그러니까 제사의 창시자일 수도 있다. 신농(神農)은 이름이 상징하듯이 농업의 신이다. 농업경작을 처음으로 가르쳤고, 또 제약(製藥)의 법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본초의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요ㆍ순도 선양제도(禪讓制度)라고 하는 이상적 정치제도를 창시하였고, 순은 효()라고 하는 문화적 가치의 전범을 보였다. 선진문헌에서는 이러한 문명의 전기를 이룩한 컬쳐 브링어즈(culture-bringers)들을 선왕(先王)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작()의 주체는 선왕(先王)이며, 이 선왕들이 작한 문명의 질서를 선왕지도先王之道라고 부르는 것이다.

 

송유들이 말하는 도통의 계보를 한번 보자!

 

복희 신농 황제 문ㆍ무 주공 - 공자

 

이러한 계보에서 주공까지가 선왕이다. 공자는 선왕(先王)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왕()의 위()가 없기 때문에 그는 선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후대에 그토록 공자에게 왕호(王號)를 부여하려고 노력한 이유도 바로 그를 선왕(先王)으로 높이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소라이(荻生徂徠)는 선왕지도(先王之道)를 구현한 것이 바로 육경(六經)이라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사서(四書)는 철저히 육경이라고 하는 선왕지도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송유들처럼 사서의 입장에서 육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공자는 위()를 얻지 못했으므로 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한 것은 단지 겸사(謙辭)가 아니라, 현실적인 자기 상황에 대한 지명(知命)의 말이라고 한다. 공자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물론 작()도 할 수 있고, ()도 할 수 있 는 능력은 소유했지만 그에게 천명(天命)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감히 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若孔子之聖, 可以作而可以述也. 命不至, 故不敢作] 공자는 예악(禮樂)을 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소라이의 논지는 매우 그럴듯한 것 같지만, 그 논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허구(metaphysical fiction)이다. 그가 선왕지도라고 말하는 예악의 질서가 모두 신화적인 단계의 것들이며 찬란한 과거 선왕의 역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했다고 하는 육경 자체가 모두 공자 이후에 문헌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공자 이전의 예악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엄존한 실체가 있었겠지만 그것이 오늘 동아시아문명의 질서의 기반으로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공자의 작()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문자 그대로 공자의 겸사로서 용인한다 하더라도 결국 공자는 술()을 통하여 작()을 이룩했던 것이다. 공자 술()이야말로 동아시아문명의 최대의 작()의 이벤트였던 것이다. 소라이가 말하는 선왕지도고언(古言)’ 그 자체가 소라이의 에도정치관을 정당화하기 위한 관념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말한다. 공자야말로 작자(作者)였다.

 

신이호고(信而好古)’()’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신험한다.’ 즉 고()를 신빙성 있는 자료들을 통하여 검증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노팽(老彭)’은 고주의 해석대로 은나라의 현명한 대부로서 공자의 마음속에 있는 옛 술자(述者)의 한 전형일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공자가 20대에 만난 노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노자(老子)가 오늘날 도덕경(道德經)의 작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세상의 흥망성쇠를 달관한 거대한 지식인으로서주나라의 수장실(守藏室)의 사()였다고 한다면 주나라 황실도서관의 관장격인 역사가였다 공자의 심상 속에 깊이있게 남아있는 한 지적 자이언트였을 것이다.

 

절비어아노팽(竊比於我老彭)’()’를 소유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색하다. ‘나의 노팽이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논어의 통용되는 용법상 오노팽(吾老彭)’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몰래 나를 노팽에 견 준다[절비아어노팽(竊比我於老彭)]’라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최근 상박초간 중에 팽조(彭祖)라는 문헌이 나와 충격을 주었다. 이 문헌은 구로(狗老)라는 어떤 사람이 팽조彭祖)에게 어떻게 하면 자기자신(朕身)을 변화시켜 천상(帝常 =天常)에 부합되는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팽조가 이에 대하여 천도(天道)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서두가 장식되고 있다. 구로(狗老)는 겸손하게 자기로서는 천도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우니, 인도(人道)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팽조는 이에 천도와 인도는 서로 표리를 이루는 것이라면서 인도, 즉 인륜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준다. 그 이야기 내용은 실로 우리가 현행 노자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대차가 없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으며 겸손하여 허()를 유지한다), 시종(始終)을 다 근신하며(전체를 볼 줄 안다), 보로(保勞)하며(노동을 유지하여 양신한다), 무슨 일이든지 도모하는 데 근심하며,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며,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고 팽조는 말한다. 재부(財富)에 집착하면 재부를 잃게 된다. 근본적으로 우려를 멀리하여 천생자연의 본능을 발휘케 해야 하고, 마음은 공백담박해야 하고 신체는 느슨하게 풀어놓아야 한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춘추시대의 사유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기보다는 전국시대 의 사유의 한 전형을 보여주며 우리가 생각하는 후기 도가의 양생술의 한 조형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이 공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시대의 작품이라고 할 때에 이미 공자시대에도 그러한 사유의 조형은 있었을 것이며, 팽조나 노팽이라는 이데아 티푸스로 대변되는 어떤 학문의 흐름이 있었을 것이다. 상박의 간문(簡文)이 우리의 논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공자에게 노팽은 보다 리얼한 역사적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는 거성이다. ()’은 옛것을 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은 창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이란 성인이 아니면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이란 그 다음 단계의 현자(賢者)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 去聲. , 傳舊而已. , 則創始也. 故作非聖人不能, 而述則賢者可及.

 

절비(竊比)’란 상대방을 높여서 하는 말이요, ‘()’란 상대방을 친근하게 여겨 하는 말이다(소유격으로 풀었다). ‘노팽(老彭)’은 상나라의 현자인 대부(大夫)였다. 대대례(大戴禮)』 「우대덕(虞戴德)편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아마도 옛것을 좋아하고 신험하여 그것을 전술(傳述)한 사람일 것이다. 공자가 를 편찬하였고, 예악을 새롭게 정형화시켰고, 주역(周易)을 찬하였으며, 춘추를 편수한 것은 모두 선왕의 옛 모습을 전한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작()한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와 같이 고백하신 것이다. 대저 작()하는 성()의 경지를 감히 넘볼 수 없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드러내고 옛 현인의 경지에 스스로 결부시키는 것도 어렵게 생각하셨다. 대저 공자의 덕이 성대해지면 성대해질수록 당신의 마음은 겸손하게 낮아지셨으니,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겸양의 말이라는 것조차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미 작()이라고 하는 것은 대강 갖추어진 시기였으므로 부자께서는 공자 이전의 뭇 성인들이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을 모아[] 절충시키는 집대성의 작업을 하셨다. 그러니 그 일을 술()이라 말한다 해도 그 공()은 작()의 몇 배나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竊比, 尊之之辭. , 親之之辭. 老彭, 商賢大夫, 大戴禮, 蓋信古而傳述者也. 孔子刪』『, 』『, 周易, 春秋, 皆傳先王之舊, 而未嘗有所作也. 故其自言如此. 蓋不惟不敢當作者之聖, 而亦不敢顯然自附於古之賢人; 蓋其德愈盛而心愈下, 不自知其辭之謙也. 然當是時, 作者略備, 夫子蓋集群聖之大成而折衷之. 其事雖述, 而功則倍於作矣, 此又不可不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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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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