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곡의 칠수 노래
염곡칠가(鹽谷七歌)①
홍세태(洪世泰)
有客有客字道長 自謂平生志慨忼
讀書萬卷何所用 遲暮雄圖落草莽
誰敎騏驥伏鹽車 太行山高不可上
嗚呼一歌兮歌欲發 白日浮雲忽陰結
해석
有客有客字道長 유객유객자도장 |
나그네여! 나그네여! 자는 도장으로 |
自謂平生志慨忼 자위평생지개강 |
스스로 평생의 뜻이 강개하다 생각하네. |
讀書萬卷何所用 독서만권하소용 |
독서 만 권인들 어디에 쓰겠는가? |
遲暮雄圖落草莽 지모웅도락초망 |
나이 들어 웅장한 꾀는 풀에 떨어진 것을. |
誰敎騏驥伏鹽車 수교기기복염거 |
누가 천리마를 소금수레에 엎어지게 해서 |
太行山高不可上 태행산고불가상 |
태항산은 높아 오를 수 없게 했는가? |
嗚呼一歌兮歌欲發 오호일가혜가욕발 |
아! 첫 번째 노래여 노래 부르려 했더니 |
白日浮雲忽陰結 백일부운홀음결 |
흰 해에 구름 껴 갑자기 어둠이 몰려드네. |
해설
이 시는 1719년 울산(蔚山) 감목관(監牧官)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7수의 연작시를 짓는데, 위의 시는 그 첫 번째 시로 자신의 평생 회한을 읊고 있다.
독서를 만 권이나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대부(士大夫)로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많은 공부는 어디에다 쓸 것인가? 나이가 들어 점점 늙어가니, 그때의 웅장한 뜻도 풀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가 나 같은 천리마로 하여금 소금수레나 끌게 했는가? 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다.
이 외에도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홍세태에 관한 일화(逸話)와 「자고사」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홍세태가 젊었을 때 「자고사」【홍세태의 『柳下集』 권에 「題季文蘭詩後」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를 지어 청성(淸城) 김석주(金錫冑)에게 인정을 받아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고적(高適)과 잠삼(岑參)의 부류로 인정받기까지 하였다. 홍세태는 이씨 집안의 종이었다. 주인은 그가 농사일을 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잡아 죽이려고 하였는데, 청성이 속임수를 써서 그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은자(銀子) 200냥이 있어야 그를 속량(贖良)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청성이 은자 100냥을 내고 동평군 이항도 은자 100냥을 내어 속량시켜 주었으니, 이항 역시 그의 재주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홍세태는 청성군과 동평군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형제도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빈우(賓友)로 대우하였다. 정승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기사년(1689, 숙종 15)에 당한 화는 기실 이항이 그를 해친 것이었다. 이항이 신사년(1701, 숙종 27)의 옥사에 처형될 때 김씨 형제들은 매우 통쾌히 여기고 그가 교수(絞首)되는 모습을 보러 나갔는데, 홍세태가 손수 이항의 시체를 염하여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는 천천히 농암에게 다가와 배알하고 그 까닭을 말하였다. 농암은 그의 의로운 행위를 가상히 여겨 더욱 후대하였다. 「자고사」는 청성이 계문란(季文蘭)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계문란은 강남의 양갓집 규수였는데, 집안이 오랑캐에게 전복되어 북쪽 심양으로 끌려가다가 진자점(榛子店)을 지나가게 되었다. 계문란은 진자점의 벽에 시를 써서 자신의 억울하고 괴로운 심사를 표현하고는, 마지막 줄에 ‘천하의 유심한 남자들은 이것을 보면 가엾게 여길 것이다.’라고 썼다【注: 내가 진자점을 물어보았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청성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가다가 이곳에 들러 벽에 쓰여 있는 것을 보니, 먹색이 아직도 변함없었다. 점인(店人)에게 이것을 쓸 당시의 일을 물었더니, ‘기병(騎兵)은 문에 서서 갈 길을 재촉하고, 여인은 눈물을 삼키며 벽에 썼는데 오른손이 힘들면 왼손으로 계속 썼습니다. 하며 매우 자세히 말해주었다. 청성은 이를 가엾게 여겨 그녀를 위해 칠언절구 한 수를 짓고 홍세태에게 여기에 화답하라고 명하였는데, 그의 시는 과연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강남 강북에서 울던 자고새, 비바람에 놀라 날아가 둥지를 잃었네. 한 번 하늘가 멀리 떨어져 돌아갈 수 없는데, 심양성 밖엔 풀만 무성하구나.’【注: 명나라가 망하자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이 대부분 만주족에게 끌려갔다. 진회(秦淮) 출신인 송혜상(宋惠湘)이란 여인은 위요역 벽에 시를 쓰기를, ‘꽃다운 열다섯 시집갈 나이에, 명비(明妃, 漢나라 元帝 때의 궁녀 王嬙으로 字가 昭君이다. 원제가 匈奴의 呼韓邪單于의 요청에 따라 명비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화친하였다) 같은 신세 되어 고향을 떠났네. 그 누가 천금을 흩어 옛날 조맹덕(曹孟德)이 양황의 휘하에서 문희(文姬)를 구해 준 것(맹덕은 曹操의 字이다. 文姬는 東漢의 학자 蔡邕의 무남독녀인 蔡琰의 자로, 음악을 잘하고 典籍에 능통하였다. 전란 때 흉노로 잡혀갔으나 후에 조조가 속량시켜 돌아오게 해 주었다)과 같이 하겠는가?’ 하였다】[洪世泰少以鷓鴣詞 見知於淸城金錫冑 至許以高岑者流 世泰李家奴也 主怒其不服事 拘將殺之 淸城詭計脫之 然銀非二百兩 不得贖 淸城乃出銀百兩 東平君杭 亦出百兩贖之 杭亦愛才故也 故世泰視淸城及杭如父 而金農巖三淵兄弟 亦愛其才 待以賓友 文谷相己巳之禍 杭實惎之 及杭死於辛巳獄 金氏兄弟快之 就觀其磬 世泰乃手斂杭尸 以報其恩 徐謁諸農巖 告之故 農巖嘉其義 待之加厚 鷓鴣詞者 淸城爲季文蘭作也 蘭 江南良家女也 家覆於虜 被掠而北 路出榛子店 題詩店壁 敍其冤苦之辭 而終曰 天下有心男子 見而憐之 余詢榛子店 人無有知者 淸城奉使之燕 過而見焉 墨痕故未渝也 問諸店人 道其書時事甚悉曰 騎者立門促行 佳人掩淚題壁 右手倦則左手接而書之 淸城憐之 爲賦七絶 命世泰和之 果絶唱也 詩曰 江南江北鷓鴣啼 風雨驚飛失故棲 一落天涯歸不得 瀋陽城外草萋萋 明亡 薄命佳人爲滿州所掠者多 宋惠湘 秦淮女子也 題詩衛耀驛壁云 盈盈十五破瓜時 已作名妃別故帷 誰散千金同孟德 鑲黃旗下贖文姬 此又文蘭一流人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하, 이담, 2010년, 238~240쪽
인용
'한시놀이터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창흡 - 갈역잡영(葛驛雜詠)⑯ (2) | 2019.11.21 |
---|---|
김창협 - 춘일재거 만용도사목흔향영천연시류 분운위시(春日齋居 漫用陶辭木欣向榮泉涓始流 分韻爲詩)④ (0) | 2019.11.21 |
김만중 - 남계잡흥(南溪雜興)① (0) | 2019.11.19 |
허균 - 남전일난옥생연 칠자위운 류증무산장옥랑(藍田日暖玉生煙 七字爲韻 留贈巫山張玉娘)④ (0) | 2019.11.18 |
최립 - 삼일포(三日浦)② (0) | 2019.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