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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가시고기 - 2. 더해지는 비극에 숨겨진 의미 찾기 본문

연재/작품을 감상하다

가시고기 - 2. 더해지는 비극에 숨겨진 의미 찾기

건방진방랑자 2019. 12. 2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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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더해지는 비극에 숨겨진 의미 찾기

 

불행한 그들에게 선물과 같던 여진희

 

둘째, 여진희란 조연의 무조건적인 희생이다. 호연이와 같은 일을 하는 후배인 그녀는 호연이에게 좋은 감정을 느껴 자신의 것을 무조건 주려 한다.

이런 인물의 출연은 비극에 빠진 그들 부자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의 빛을 선사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만약 이런 조연 없이 소설이 전개되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소설 전체가 우울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그건 비극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이분법적 전개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조연을 통해 희망을 암시함으로, 삶의 무한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절망과 희망 사이를 줄다리기 할 수 있도록 긴장감을 조성해 준다.

 

 

 

아버지에게 간암이란 절대적인 비극을 부여하다

 

셋째, 반전 요소의 삽입이다. 반전이라는 게 일의 형세가 예측치 못한 방향으로 뒤바뀜을 말하는 것이기에,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다움이의 병이 완치된다는 식의 긍정적 반전이 있기를 기대했을 거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그 반대이다. 설상가상이란 표현이 맞을 정도로 슬픈 반전만 있기 때문이다. 호연이는 다움이의 병원비를 마련코자 신장을 팔려고 검진을 받던 중,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로지 다움이의 완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호연이에겐 청천 날벼락 같은 비보였으리라. 정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실 무력감이 밀려오는 순간이다. 그나마 다움이에겐 유일한 희망이요, 유일한 사랑이었던 아빠에게 간암이란 판정을 내리게 할 줄이야. 정말 저자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배신감이었다.

가시고기? 저자는 처음부터 가시고기를 호연이로 간주하고 있었다. 다움이는 가시고기의 특성을 알을 낳자마자 어미 고기는 도망가고 아빠 고기만이 그 새끼들을 돌보다가 새끼들이 다 제 갈 길로 가면, 돌 틈에 머릴 박고 죽어 버리는 부성애적 물고기라고 설명하며 자꾸 아빠를 가시고기와 일치시켜 본다. 이건 호연이의 미래에 대한 복선이자, 암시였으리라. 나중에 그 아빠 가시고기가 그랬듯 호연이도 죽음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고 싶었기에 호연이에게 병을 걸리게 할 줄은, 그것도 치유가 불가능한 암이라는 병에 걸리게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런 생각은 아예 하기 싫었다. 비극에 비극을 덧붙임은 잔인한 행위임을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런 잔인함이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그저 어이없는 웃음만 나온다. 이런 웃음을 실소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런 슬픈 반전 또한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제공한다. 하나는 부성애의 극치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부성애를 발휘해도 박수 받을 만한데, 거기에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부성애를 발휘한다면, 그건 이미 말이 필요 없지 않은가? , 진정한 부성애를 나타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얘기이다. 다른 하나는 아내에게 어쩔 수 없이 양유권을 넘기게 됨으로 다움이에게 있어 엄마의 위치를 재확립시켜줬다는 것이다. 물이 말라버린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아빠의 존재가 떠나버린 다움이에겐 엄마라는 존재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럼으로 새로운 人情이 시작된다. 비록 양유권의 양도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렇듯 반전에는 부성애의 극치로의 유도와 모권의 자리매김이란 두 가지 측면의 의미가 있다.

 

 

 

 

 

다움이의 희망을 위한 아빠의 죽음

 

넷째, 비극으로써의 희망제시이다. 비극이 희망과 연관된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움이는 마지막 희망인 골수 이식을 받음으로 거의 완치가 되었고 엄마에게 양유권이 양도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파리로 떠나가 된다. 하지만 호연이는 다움이와 함께 했던 산골 학교로 찾아가 다움이의 채취를 느끼며, 죽음의 그 순간까지 부성애를 발휘하며 차가운 목석이 되어 간다. 이런 호연이의 아픔이나 죽음을 다움이나 아내는 알지 못한 채, 그들에게 남아 있는 미지의 세계로의 희망을 찾아 떠난다. 호연이의 죽음은 분명히 비극적이지만 그로인해 다움이는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새로운 세계에서 다움이가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이런 결말 제시법은 김동리의 을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용 전반이 너무 어두움에도 그들 부자의 미소는 밝았으니까. 어떠한 불행이 다가와도 그들 부자만은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랐을 정도였으니, 이 소설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충 짐작될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속상해 하지 마라라는 말이 문뜩 뇌리를 스친다. 삶은 무한궤도를 통해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슬픔이나 아픔은 기쁨이나 행복을 위한 전단계임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인용

목차

1. 삶은 다분법적인 관점으로 봐야 한다

2. 더해지는 비극에 숨겨진 의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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