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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서설(序說) - 2. 자료의 선택 문제: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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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서설(序說) - 2. 자료의 선택 문제: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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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속선(風謠續選)은 제명(題名) 그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속편(續篇)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松石園)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이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昭代風謠)이후의 위항시인 가운데서 333()723수를 선집(選輯)하여 그 주갑(周甲)이 되는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에 운각자(芸閣字)로 인행(印行)7() 3책본(冊本)이다. 그러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와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대풍요(昭代風謠)기아(箕雅)의 예에 따라 시체별(詩體別) 편제(編第)를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은 고체(古體)ㆍ금체(今體)ㆍ오언(五言)ㆍ칠언(七言)을 가리지 아니하고 각인(各人)의 성씨 아래 작품들을 열록(列錄)하여 고람(考覽)에 편하도록 하였다. 범례(凡例)에서도 이같은 취지를 밝히고 있으나 대부분 금체시(今體詩)로 채워져 있는 이 책에서는 시체별(詩體別)로 편차를 하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수(卷首, 卷之一) 소재(所載) 32()의 시편(詩篇)소대풍요(昭代風謠)의 권말(卷末)에 수록(收錄)된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다시 일권(一卷)으로 합집(合輯)한 것으로서, 그 체단(體段)을 갖추고 미진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재록(再錄)한 것이다.

 

이덕함(李德涵)의 발문에 따르면,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뒤에도 많은 시인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 그 주갑(周甲)이 된 지금에 있어서는 그들의 이름조차 일실(逸失)한 시인들이 태반이나 되었으므로 송석원(松石園)이 중심이 되어 다시 시()를 수집, 예원(藝苑)의 명감(明鑑)에 취정(就正)하여 기험(奇險)한 것은 버리고 평정(平正)한 것은 취하여 정선(精選)ㆍ집약(集約)하게 되었다 하고, 또 그 목적은 매몰된 것에 대한 발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세지사(當世之士)로 하여금 더욱 면려(勉勵)토록 하여 후일을 기다리는 데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위항시인들이 그들의 시집(詩集)을 간행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단순한 시집(詩集)의 간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군자(君子)명자외물(名者外物)”이라 하여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불우한 처지에서 금세(今世)를 살아야만 하는 위항시인들에게 그것은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지는 위항시집(委巷詩集)의 선구가 된 해동유주(海東遺珠)소대풍요(昭代風謠)의 간행에 추진력이 되었으며 마침내 18세기 말에서부터 본격적인 유파적(流派的) 활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사(詩社)의 결성에 활력소가 되었다. 풍요속선(風謠續選)의 간행에 구심체가 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일명(一名) 옥계시사(玉溪詩社)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원래 시사(詩社)의 결성은 사대부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위항시인이 중심이 된 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에 이르러 시사적(詩社的)인 문학활동은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분위기와 성격은 존재집(存齋集)의 다음 글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 송석선생(松石先生)이 옥계(玉溪) 위에 살면서 문사(文史)로써 스스로 즐기니 뜻을 같이 하는 이웃 선비들이 날로 서로 송석간(松石間)에 왕래(往來)하였다. 모이면 반드시 시()가 있는지라 이 시들이 모여 책을 이루었다. 이것이 시사(詩史)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

嗚呼! 松石先生居玉溪上 以文史自娛 鄕隣同志之士 日相與往來於長松老石之間 會必有詩 詩之成卷 此詩史之所以作也. -朴允默, 存齋集23, 玉溪詩史序

 

 

이 시사(詩社)의 중심인물은 대부분이 풍요삼선(風謠三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일부가 풍요속선(風謠續選)의 후반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이 책의 편자인 장혼(張混)은 일생을 규장각서리(奎章閣胥吏)ㆍ외각교서(外閣校書)의 이원(吏員)으로 있었지만, 사부서(四部書)를 박람(博覽)하고 시()에 뛰어나 그의 수교(讐校)를 거쳐 발간된 편서(編書)만도 여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김매순(金邁淳)이서구(李書九)홍석주(洪奭周) 등 당대(當代)의 명문대가(名門大家)들과도 사귀어 왕복서(往復書)로써 문학적인 교유(交遊)도 가졌다. 특히 그의 시는 부섬아순(富瞻雅順)하여 이서구(李書九)고체심득 한위여향(古體深得, 漢魏餘響).”이라고 하였으며구자균(具滋均), 근대적 문인(近代的 文人) 장혼(張混)에 대하여, 국문학논총(國文學論叢), p.35에서 인용홍석주(洪奭周)는 그에게 답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의 문()은 시()가 가장 뛰어났으며 시()는 고체(古體)에 더욱 뛰어났소이다. 사언(四言)은 위진(魏晉)에서 그림자를 따오고 오언(五言)은 왕유(王維)와 위응물(韋應物)에서 다듬었으므로……또한 그대의 시()가 오늘날의 시()가 아님을 알겠도다.

足下之文, 最長於詩, 詩尤長于古體. 四言隱約魏晉, 五言灑削王韋亦知足下之詩, 非今世詩也. -洪奭周, 淵泉集書卷, 答張生混書

 

 

그 근원이 깊고 먼 데서 온 것임을 칭도(稱道)하고 있다. 금체(今體)가 행세(行世)하던 당시의 소단(騷壇)에서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능력을 과시한 그의 시업(詩業)은 사대부의 그것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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