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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연암가 청렴결백 - 2. 야천 선생과 다섯 아들의 청렴결백 본문

문집/과정록

연암가 청렴결백 - 2. 야천 선생과 다섯 아들의 청렴결백

건방진방랑자 2020. 4. 1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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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천 선생과 다섯 아들의 청렴결백

 

 

冶川先生, 慍于羣小, 遯跡流寓, 卒於嶺表, 竟亦不能返葬.

于時, 長子贊成公十九歲, 次子潘城公九歲, 三子文貞公八歲, 四子吾七世祖都憲公五歲, 季子都正公三歲, 啼號滿室. 夫人左提右挈, 間關北歸. 吾在嶺邑, 屢拜先生之墓, 獨立在萬疊空山, 追念當日情事, 每思之欲哭, 患難貧窮, 一至於此.

及夫五子登朝, 皆爲名公卿賢大夫, 贊成公屢典郡邑, 往往不得挈家, 文貞公方食卿祿, 一半分獻邱嫂. 每公退, 不脫朝衣, 往問何有何無, 躬發甁甔而視之, 有空者, 辦而充之. 文貞公冰蘖淸操, 畏服一世, 其食貧, 固自如也.

潘城公貴爲國舅, 而一室蕭然. 大婚時, 中外助資, 故事也, 獨不受一物, 儉以成禮.

而吾先祖都憲公, 時方有新進雅望, 乃自以地近戚畹, 謙約彌甚, 杜門掃跡, 唯以書史花竹自娛, 以此平生, 遂無膴仕. 一門之淸素澹泊, 到底如此.

 

 

 

 

해석

冶川先生, 慍于羣小[각주:1],

야천 박소(朴紹) 선생은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遯跡流寓, 卒於嶺表,

자취를 감췄고 흘러 다니며 우거하시다 영남에서 돌아가셨고

 

竟亦不能返葬[각주:2].

마침내 또한 고향에서 옮겨 장사지내질 못했다.

 

于時, 長子贊成公十九歲, 次子潘城公九歲,

이때에 첫째 아드님 찬성공 박응천(朴應川)께서는 19살이셨고 둘째 아드님 번성공 박응순(朴應順)께서는 9살이셨으며

 

三子文貞公八歲,

셋째 아드님 문정공 박응남(朴應男)께서는 8살이셨고

 

四子吾七世祖都憲公五歲,

넷째 아드님인 우리의 7대 선조이신 도헌공 박응복(朴應福)께서는 5살이셨고

 

季子都正公三歲, 啼號滿室.

막내 아드님인 도정공 박응인(朴應寅)께서는 3살이셨으니, 울음소리가 집에 가득했었다.

 

洪夫人左提右挈, 間關北歸.

홍부인께서는 자식들을 좌로 우로 이끌고 수레 끌며 한양으로 돌아오셨다.

 

吾在嶺邑, 屢拜先生之墓,

내가 안의현감에 있을 적에 야천 선생의 무덤을 자주 참배했는데

 

獨立在萬疊空山, 追念當日情事,

홀로 겹겹이 쌓인 빈 산에 서서 당시의 사정을 추억해보며

 

每思之欲哭, 患難貧窮, 一至於此.

매번 환난과 빈궁이 한결 같이 여기에 이르렀나라는 생각으로 눈물이 나려했다.

 

及夫五子登朝, 皆爲名公卿賢大夫[각주:3],

다섯 아드님께서 벼슬길에 올라 모두 이름난 관리와 어진 공직자가 되었으니

 

贊成公屢典郡邑, 往往不得挈家,

찬성공 박응천공께서는 여러 차례 지방고을을 맡았지만 자주 가족을 데려가지 않으셨으며

 

文貞公方食卿祿, 一半分獻邱嫂.

문정공 박응남공께서는 나라의 녹봉을 받아 반절을 나눠서 형수에게 드리셨다.

 

每公退, 不脫朝衣, 往問何有何無,

매번 공께서 조정에서 물러나면 조정의 옷을 벗지도 않고 가서 무엇이 있고 없는지 여쭈었고

 

躬發甁甔而視之, 有空者, 辦而充之.

몸소 장독을 열어 보고 비어 있는 것은 판별하여 채워드렸다.

 

文貞公冰蘖淸操, 畏服一世,

그래서 문정공께서는 맑은 지조를 얼음같이 지켜 한 세상의 경외함을 받으셨고

 

其食貧, 固自如也.

먹음이 빈곤하더라도 진실로 여유로우셨다.

 

潘城公貴爲國舅, 而一室蕭然.

반성공 박응순은 귀하게 임금의 장인이 되었지만 한 집안은 쓸쓸했었다.

 

大婚時, 中外助資, 故事也,

왕실과 혼인을 맺을 때 안팎으로 재물을 도와주는 것이 오랜 관례지만

 

獨不受一物, 儉以成禮.

홀로 한 물건도 받질 않으셨고 검소하게 혼례를 치르셨다.

 

而吾先祖都憲, 時方有新進雅望,

나의 선조 도헌공께서는 시방에 관직에 막 진출해 우아한 명망이 있으셨지만

 

乃自以地近戚畹, 謙約彌甚,

곧 스스로 처지가 임금의 친척과 가깝다고 하여 겸손과 절약을 더욱 극심히 하셨고

 

杜門掃跡, 唯以書史花竹自娛,

문을 닫고 자취를 없앤 채 오직 글씨ㆍ역사ㆍ꽃ㆍ대나무로 스스로 즐기셔서

 

以此平生, 遂無膴仕.

이것으로 평생을 보내고 마침내 후한 봉록을 타는 벼슬을 하지 않으셨다.

 

一門之淸素澹泊, 到底如此.

한 가문의 청렴하고 분수에 따르며 담백하여 아주 깊고 철저하기가 이와 같았다.

 

 

인용

전문

 

 

 

 

  1. 박소는 당시의 세도가 김안로(金安老)에게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남양(南陽)에 피해 있다가 외가가 있던 합천으로 내려가 평생을 보냈다. [본문으로]
  2. 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지냄 [본문으로]
  3. ‘공(公)’은 3공(三公)을 가리키니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고, ‘경(卿)’은 9경(九卿)을 가리키니 좌참찬(左參贊)과 우참찬(右參贊), 6조(六曹)의 각 판서, 한성부의 판윤(判尹)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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