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조 박상충과 박은의 청렴결백한 예화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吾先祖潘南先生, 旣以斥元尊明, 爲羣兇所阸, 卒於靑郊驛. 未能返櫬, 而葬于其地, 卽國東門外耳. 其貧無以爲力, 可知也.
平度公自言: ‘孤貧且疾, 志氣猶存.’ 及際會風雲, 久秉匀軸, 猶不免脫粟飯, 幾乎狼狽. 公家在駱山下.
一日, 太宗倉卒臨門, 怒公出迎之遲也. 公曰: ‘臣適得粟飯, 恐妨奏對, 水漱然後敢出也.’ 上命取而視之, 愈怒曰: ‘無亦公孫布被耶? 安有大臣而飯荒粟者?’ 左右言: ‘大臣之宗族親友, 待而擧火者甚衆, 祿米入室, 一夕散盡.’ 上憮然曰: ‘予之過也! 予爲國君, 使布衣故人, 不厭麤糲, 予不及卿之賢, 遠矣!’ 卽席賜興仁門外鼓巖田十結.
해석
嘗詔不肖輩曰:
일찍이 우리들에게 가르치셨다.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너희들이 다른 날에 비록 녹봉을 받더라도 가계가 넉넉하길 바라지 마라!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우리 집은 대대로 청빈하길 전해왔으니 청빈이 곧 본분일 뿐이다.”
因歷擧家傳故事曰:
그래서 집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일일이 열거해주셨다.
“吾先祖潘南先生, 旣以斥元尊明,
“우리 선조인 반남 박상충(朴尙衷) 선생께서는 이미 원나라를 배척하셨고 명나라를 존중하셔서
爲羣兇所阸 1, 卒於靑郊驛 2,
흉악한 무리들에게 방해를 받아 청교역에서 돌아가셨고
未能返櫬, 而葬于其地, 卽國東門外耳.
관을 돌아오게 할 수 없어 그곳에서 장사 지냈으니, 곧 나라의 동문 밖이었다.
其貧無以爲力, 可知也.
가난하여 힘을 삼을 게 없었음을 알 수 있다.
平度公自言:
아드님인 평도공 박은(朴訔)께선 스스로 말씀하셨다.
‘孤貧且疾, 志氣猶存.’
‘나는 어려서 가난하고도 병들었지만 지기만은 아직 있었다.’
임금의 은총을 만날 즈음에 미쳐 오래도록 정승의 자리에 잡으셨지만
오히려 거친 밥 먹는 걸 벗어나질 못했으니, 낭패함에 가까웠지.
公家在駱山下.
공의 집은 낙산 아래에 있었다.
一日, 太宗倉卒臨門, 怒公出迎之遲也.
하루는 태종께서 갑작스레 공의 집에 다다랐지만 공이 나와 맞이함이 늦음을 화내셨어.
그러자 공께서 ‘신하가 마침 거친 밥을 먹던 중이라 임금의 물음에 답하는 데 방해될까 걱정되어
水漱然後敢出也.’
양치질 한 후에야 감히 늦게 나왔습니다.’
上命取而視之, 愈怒曰:
임금이 가져오라 명하시고 보고나선 더욱 화를 내셨다.
‘또한 공손홍이 삼베 이불을 덮던 일이 아닌가?
安有大臣而飯荒粟者?’
어째서 대신이 거친 밥을 먹는가?’
左右言: ‘大臣之宗族親友, 待而擧火者甚衆,
좌우의 신하들이 사뢰었다. ‘대신의 친척과 친구들이 기다려 불을 피우는 사람이 매우 많아
祿米入室, 一夕散盡.’
녹봉의 쌀이 집에 들어오면 하루저녁에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上憮然曰: ‘予之過也!
임금께서 무안해하며 말씀하셨다. ‘나의 잘못이네!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어 포의인 친구에게 거친 밥으로도 배부르지 못하게 했으니,
予不及卿之賢, 遠矣!’
내가 그대의 어짊에 미치질 못하는 게 멀기만 하네!’
卽席賜興仁門外鼓巖田十結.
곧 그 자리에서 흥인문 밖의 고암 8의 전지 10결을 하사하셨다.
인용
- 우왕(禑王) 때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 일파를 가리킨다. 박상충은 시중(侍中)을 지내던 이인임의 국정을 독단하며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려 한다 하여 사형을 요구하다가 도리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 가던 도중에 죽었다. [본문으로]
- 청교역(靑郊驛): 개성 덕암동(德巖洞) 보정문(保定門) 밖 5리쯤 되는 곳에 있는 역 이름이다. [본문으로]
- 균축(勻軸) : 정승의 자리. [본문으로]
- 탈속반(脫粟飯): 껍질만 벗기고 쓿지는 않은 쌀, 즉 현미(玄米)로 지은 밥을 말하는데, 거칠고 변변찮은 음식을 의미한다. 안영(晏嬰)이 늘 이것을 먹었다고 한다. -『晏子』 「雜下」 [본문으로]
- 奏對: 임금의 물음에 답하여 아룀 [본문으로]
- 한나라 무제(武帝)의 신하인 공손홍(公孫弘)이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삼베로 만든 이불을 덮었다. 당시의 강직한 인물인 급암(汲黯)은 봉록을 많이 받는 공손홍이 삼베 이불을 덮는 건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본문으로]
- 박은은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태종과 의기가 상통하여 1, 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본문으로]
- 고암(鼓巖): 지금의 종암동이다. 안암동에 있는 ‘북바위’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고암ㆍ종암(鍾巖)’ 등으로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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