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총평
1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글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기실 글쓰기의 문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이 글은 문자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연암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자를 그냥 문자로만 알아서는 안 되고, 문자에 생기와 온기 및 사물의 다채로운 뉘앙스를 채워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문자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관점은 『과정록』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아버지는 이공(이광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평생 독서했는데 아는 글자가 몇 자나 되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비웃었다.
‘이공이 글을 잘하고 박식한 선비라는 걸 누가 모른단 말야!’
이공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겨우 서른 자 남짓 아는 것 같군요.”
좌중의 사람들이 또 한 번 깜짝 놀랐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공은 이 한마디 말로 단박에 아버지와 지기知己가 되어 이후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 지은 시문詩文이 있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평을 청하였다. -1권 41번
先君問之曰: “君平生讀書, 識得幾個字?” 座客皆大駭, 心笑之曰: “孰不知李公文章博洽士也?” 李公點檢良久語曰: “僅識得三十餘字.” 座客又大駭, 不知其何謂也. 自是李公定爲一言知己, 頻頻來訪, 有新成詩文, 必袖以請評.
3
연암이 강조하는 이런 방식의 글읽기는 ‘자아’의 측면에서 본다면 ‘주체성’의 강조로 연결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연암의 경우 이런 의미에서의 주체성은 ‘개아個我’와 ‘국가’의 양 차원에서 모두 문제적이다.
4
이 글은 짧은 편지글임에도 대단히 문예성이 높다. 그 언어는 형상적이고, 생기발랄하며, 경쾌하다. 경쾌하면 경박하기 쉬운데, 이 글은 경박하지 않고 아주 진지하다.
5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절묘하여 흡사 소동파의 글 같다.”
▲ 전문
인용
3. 새를 글자 속에 가두다
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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