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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정석치 제문 - 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본문

책/한문(漢文)

정석치 제문 - 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8.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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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단락이 느닷없는 출발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산문 분석에서는 이런 시작 방식을 ‘sudden start’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으로 시작되는 서두는 독자의 심리에 강한 인상과 파문을 던지면서 초입에서부터 독자를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독자는 어떤 심리적 준비 과정도 없이 단박에 대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강요당한다. 그런데다가 이 단락의 문장은 그 호흡이 유장하고 느긋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짧고 촉급하다. 빠른 숨으로 단숨에 읽도록 씌어진 문장인 것이다. 왜 서두에서부터 이렇게 급한 템포의 문장을 서술한 걸까? 이는 연암의 심리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단락의 통사 구조統辭構造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A)

(B)

살아 있는 석치라면 이러이러할 텐데,

그럴 수 없는 걸 보니 석치가 진짜 죽었구나.

 

 

여기서 (A)이러이러할 텐데는 석치가 살아있을 때 연암과 함께한 일상의 이런저런 행위들을 말한다. 이 일상의 행위들은 몇 개의 병렬구竝列句를 통해 질풍노도와 같이 단숨에 서술된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어서 굳이 생각지 않아도 툭 튀어나와 쭈르르 열거되는 사안들이다. 그만큼 둘은 가까웠던 것이다. 둘은 친구나 친지의 초상을 당하면 함께 문상을 가 곡을 하거나 조문을 했다(可會哭可會吊). 그렇건만 지금 그런 석치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석치가 살아있을 때 연암은 늘상 석치와 함께 껄껄대고 함께 누군가를 욕하고 말술을 마셔 고주망태가 되어 서로 엉겨 붙어 싸우기도 하고 인사불성이 되어 속칭 오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지금 그런 석치가 있어야 할 자리건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석치는 정말 죽은 게 맞구나! 석치는 늘 연암의 일상 속에서 연암과 함께했다. 하지만 지금 석치는 연암의 일상 속에 있지 않다.

 

연암은 이를 통해 석치의 부재(=죽음)를 확인한다. 친한 사람의 죽음은 그와 함께했던 일상 속 그의 빈자리에서 가장 잘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와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것은 공부일 수도 있고, 여행일 수도 있으며, 자전거 타기나 등산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그림일 수도 있으며, 유쾌하고 즐거운 조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을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부재를 뚜렷이 느끼며 커다란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연암은 이런 심리적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今石癡眞死矣)”라는 구절에서 지금()’이라는 말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긴 가정문과 그에 이어지는 단정문의 경계 부분에 서 있다. 그리하여 이 단어는 현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르기까지의, 한편으로는 퍽 당혹스럽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슬픈 연암의 심리적 추이를 응축해내고 있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파격적인 제문

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3. 자유분방하게 감정을 토로하다

4. 천문학ㆍ수학ㆍ지리학 등 학문에 뛰어났던 그대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6. 머리로 아는 죽음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죽음

7. 진짜로 네가 죽었구나

8. 사라져 버린 본문

9.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친구

10. 울울하던 그날 함께 하던 벗

11. 파격적인 제문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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