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울울하던 그날 함께 하던 벗
홍국영은 1780년 2월 권력에서 축출된다. 박지원은 더 이상 연암협에 은거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해 5월 중국 여행길에 올라 동년 10월에 귀국한다. 박지원은 귀국 후 서울과 연암협을 오가며 『열하일기』의 집필에 힘을 쏟는다. 『과정록』은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는 경자년(1780)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谿에 거처하셨으니 곧 지계공芝溪公(연암의 처남인 이재성)의 집이었다. 이때 홍국영이 실세하여 화근은 사라졌지만 점잖은 옛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떴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해 옛날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욱 뜻을 잃고 스스로 방달하게 지내셨는데 그것이 몸을 보존하는 비결임을 도리어 기뻐하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답답해하시며 멀리 떠났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마침 아버지의 삼종형인 금성도위錦城都尉(임금의 부마인 박명원)께서 청나라 건륭 황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에 가시게 되어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중략) 아버지는 귀국 후 더욱 배회하셨으며 즐거운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당시 연암협에 혼자 들어가 지내셨는데 혹은 해를 넘기시기도 하고 혹은 반년이 지나 돌아오시기도 했다. -1권 35번
庚子撤還京師, 寓平谿, 卽芝溪公宅也. 時洪國榮敗, 禍色始熄, 而老成舊要, 凋謝殆盡. 風氣一變, 非復舊日者. 益濩落自放, 反喜其爲存身之訣. 然常鬱鬱, 有遐擧之想.
會先君三從兄錦城都尉, 以賀使赴燕, 要先君共行. (중략) 時獨入處燕峽, 或經年或半歲, 乃歸.
이 기록은 1780년을 전후한 시기 연암의 울울한 처지를 잘 전하고 있다. 당시 홍대용은 경상도 영천의 군수로 나가 있었다. 따라서 연암은 이 무렵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정철조와 주로 어울리곤 했을 것이다. 일찍이 정철조는 연암이 은거하던 연암협을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를 집필할 때 정철조에게 중국 책을 참조해 북경 지도를 좀 그려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글을 쓸 때 참조하기 위해서였다. 연암은 『열하일기』 속에다 이 사실을 특별히 명기해 놓고 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와 여행했던 곳을 생각할 때면 기억이 흐릿하여 마치 눈앞에 안개가 낀 것 같고, 정신이 아득하여 새벽꿈에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남북이 헷갈려 이름과 실상이 어긋났다. 나는 어느 날 정석치에게 『팔기통지八旗通志』(청나라 웅정제 때 편찬된 책)를 보고 북경의 자금성을 좀 그려달라고 했다. 석치가 그려 준 지도를 펼쳐보니 북경의 성곽,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 궁궐, 거리, 상점, 관아가 손금을 보듯 또렷했으며, 종이에서 사람들의 신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황도기략
余旣自中國還, 每思過境, 愔愔如朝霞纈眼, 窅窅如曉夢斂魂. 朔南易方, 名實爽眞. 一日俾鄭石癡, 就『八旗通志』圖出皇城. 一披圖而城池宮闕街坊府署, 如覩掌紋, 紙上如聞履屐聲.
당시 연암이 정철조와 얼마나 가까이 지냈던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런 정철조가 1781년 겨울 갑자기 세상을 떴다. 연암의 충격과 상심이 오죽했겠는가.
▲ 전문
인용
1. 파격적인 제문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7. 진짜로 네가 죽었구나
8. 사라져 버린 본문
10. 울울하던 그날 함께 하던 벗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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