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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정석치 제문 -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본문

책/한문(漢文)

정석치 제문 -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건방진방랑자 2020. 4. 18.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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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이 단락은 잠시 숨을 고르는 부분이다. 앞 단락이 아주 빠른 템포로 감정의 직절적直截的 분출을 보여주었다면, 이 단락은 망자亡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서술해놓고 있다. 앞 단락이라 한다면 이 단락이다. 이렇듯 두 단락은 퍽 대조적이다. 이처럼 완급을 교대해가며 서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독자를 편안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으로만 일관하거나 으로만 일관하는 글을 한번 상상해보라. 독자는 전자의 경우 숨이 가빠 죽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지루해 죽을 것이다.

 

한편, 앞 단락이 격렬함과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거쳐 체념의 감정으로 끝나고 있고, 그것을 받아 이 단락이 시작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연암은 격한 감정이 잠시 잦아듦에 따라 초점을 잃은 듯한 멍한 눈으로 빈소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이 대목이 보여주는 연암의 관찰과 생각들은 이 제문을 한갓 개인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의미를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역시 연암답다. 개인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사회와의 연관, 사회와의 긴장 관계를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석치의 죽음은 심중한 사회적 의미관련을 획득한다.

이 단락에는 석치와의 관계에 따라 네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 그 하나는 모여서 곡을 하는 유족들과 친지들이고, 그 둘은 모여서 조문하는 벗들이고, 그 셋은 평소 석치를 미워하거나 석치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자들이고, 그 넷은 이 세상을 초월해 도인道人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

 

석치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그 형제, 아내, 자식 등의 가족일 터이지만, 외가와 처가의 인척들 및 석치의 벗들 역시 슬픔에 잠겨 애도를 표한다. 석치의 학문적 재능과 예술적 출중함을 생각한다면 52세로 타계한 석치의 죽음은 몹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석치의 죽음을 안타까운 일로 애도한 것은 아니다. 이 단락은 그 중간 부분, 한편,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與石癡有怨者, 痛罵石癡病死)”에 이르러 분위기가 싹 바뀐다. 어찌 보면 이 단락의 핵심은 바로 이 대목에 있을지 모른다.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는 법이니까(石癡死而罵者之怨已報, 罪罰無以加乎死)”라는 말은 흡사 연암의 독백처럼 들리는데, 역설적 표현을 통해 그런 자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석치를 저주한 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현재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석치가 소북小北에 속했으며 그 매부가 남인南人의 촉망받던 학자인 이가환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반대당인 노론의 인사들, 특히 벽파僻派 계열의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당시 소북은 당세黨勢가 미미했으며 대개 남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석치의 둘째 누이동생이 이가환에게 시집간 데서도 이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가환은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으로서, 정조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정조가 친히 임한 문신제술文臣製述(문신에게 글을 짓는 시험을 보이는 일)에서 누차 수석을 차지함으로써 일찍부터 정조의 주목과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을 강조한 정조는 강성한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과 소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므로 남인의 대학자인 성호 이래의 가학家學과 타고난 박람강기를 바탕으로 경학經學과 자연과학 등 온갖 학문에 통달해 있던 이가환은 정조에게는 좀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가령 정조실록의 정조 2(1778) 214일 조에 보면 정조가 당시 승문원 정자正字로 있던 이가환을 불러 경서와 천문역법 등에 대해 문답한 내용이 길게 실려 있는데 정조는 이가환이 해박하다고 평하면서 몹시 흐뭇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후 이가환은 출세가도를 달려 정도 58월에는 임금의 특지特旨로 지평에 제수되기에 이른다. 지평은 사헌부 소속의 정5품관이다. 비록 품계는 그리 높지 않아도 이 벼슬은 조정의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왜냐하면 3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백관百官의 비위 사실에 대한 탄핵권을 갖고 있었고, 인사 및 법률 개편에 대한 동의와 거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정조 57월 무렵 석치 역시 지평의 벼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석치는 얼마 안 있다 사간원의 정6품 벼슬인 정언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실록의 정조 594일자 기사에는 당시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글을 올려 정철조를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참여시킬 것을 청하는 말이 보인다. 이 기사를 끝으로 실록에는 석치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데, 아마 이해 9월 이후의 어느 시점에 타개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볼 때 석치와 이가환은 한 묶음으로 묶이는 사람이다. 둘은 중국에서 간행된 최신 서학서인 역상고성曆象考成(천문역법에 관한 책)수리정온數理精蘊(수학에 관한 책)등을 깊이 탐구하는 등 실학에 대한 학문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청요직淸要職의 벼슬을 맡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가환은 그 출중한 능력으로 인해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석치가 저주를 받은 것은 이런 사정과 관련이 없지 않을 터이다. 노론 강경파 측에서 본다면 석치와 그 매부 이가환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고 질서와 음해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파격적인 제문

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3. 자유분방하게 감정을 토로하다

4. 천문학ㆍ수학ㆍ지리학 등 학문에 뛰어났던 그대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6. 머리로 아는 죽음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죽음

7. 진짜로 네가 죽었구나

8. 사라져 버린 본문

9.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친구

10. 울울하던 그날 함께 하던 벗

11. 파격적인 제문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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