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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1. 요로원의 두 선비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1. 요로원의 두 선비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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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해체의 시학(詩學): 파격시의 세계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 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 김준오 도시시와 해체시중에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숙종(肅宗)조의 한 시골 선비가 서울서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충남 아산 어름의 요로원에 잠자리를 찾아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든 말에 초췌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는 가는 곳마다 홀대와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가 여관방에서 서울의 행세하는 집안의 끌끌한 선비와 함께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기본 줄거리이다.

 

서울 선비는 시골 선비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 아예 대놓고 비아냥거린다. 시골 선비는 작정을 하고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촌놈 행세를 한다. 이에 더욱 기가 난 서울 선비는 숫제 아래 것 다루듯 시골 선비를 희롱하며 놀다가 완전히 기를 죽여 놓으려고 육담풍월(肉談風月) 짓기 시합을 제의하였다. 육담풍월이 무엇인고 하니, 다섯 자 일곱 자로 언문진서(諺文眞書)를 섞어 짓는 문자 놀음이다. 다음은 서울 선비가 먼저 던진 풍월이다.

 

我觀鄕之賭 怪底形體條 내가 시골 내기를 보니 몸 가짐을 괴상히 하는 도다.
不知諺文辛 何怪眞書沼 언문 줄도 알지 못하니 진서(眞書) ‘함을 어찌 괴상타 하리.

 

원문과 번역을 대조해 보면 갸우뚱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구의 끝 글자는 한자의 의미로 새긴 것이 아니라, 훈으로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기이니 향지도(鄕之賭)’는 섞어 독()을 하여 시골내기가 되고, ‘()’가지라서 형체조(形體條)’몸가짐으로 읽는다. ‘()’은 맛이 쓰다는 뜻으로, ‘언문신(諺文辛)’이라 해 놓고서 언문을 쓴다고 읽고, ‘()’이니 진서소(眞書沼)’진서(眞書)를 못함즉 한문을 모른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서울 선비는 제깟 것이 뜻인들 알랴 하는 마음으로 풍월을 읊고는 득의양양 했겠다. 그리하여 화답을 재촉하니 시골 선비는 짐짓 못하겠노라고 사양을 한다. 더욱 기세가 오른 서울 선비는 화답치 않음은 나를 업신여김이니 이 방에서 몰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시골 선비는 마지못한 척 풍월을 읊조렸다.

 

我觀京之表 果然擧動戎 내가 서울 을 보니 과연 거동이 도다.
大抵人物貸 不過衣冠夢 대저 인물을 었으나 의관을 꾸민것에 불과하도다.

 

()’()’이 되고, ‘()’은 뙤놈이란 뜻을 되다로 읽었다. ‘()’꾸다, ‘()’이니 이를 꾸미다로 읽었다. ‘시골내기를 우습게보다가 서울 것이 된통 당한 형국이다. 네까짓 것이 언문도 쓸 줄 모른다니 진서야 일러 무엇하겠느냐고 맞보았던 서울 것에게, 그래 너는 겉만 번드르 했지 잘난 게 무에냐는 반격이다. 내용으로만 보자면 시랄 것도 없는 시덥잖은 말장난이지만, 순발력과 재치가 돋보인다.

 

 

서울 것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쪽같이 속았던 자신이 부끄럽고, 깜찍하게 속였던 시골내기가 맹랑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서울 것과 시골내기는 시 짓기 시합을 벌이는데, 여기에 동원된 시체(詩體)라는 것이 앞서 소개한 바 있던 잡체시들이다. 인명(人名)을 넣어 짓는 인명시(人名詩)로 겨루고, 연구(聯句)로 주거니 받거니 시합하고, 다시 육언(六言)으로 실갱이를 하다가, 종내 357()의 층시(層詩)로 옮겨 가고, 약명체(藥名體)로 승부를 결하였다. 서울 것은 시골내기에게 끝내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참패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번엔 거꾸로 시골내기가 오행시(五行詩)로 겨룰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짓는 방법은 첫 구 첫 자에 ()’자를 넣고, 끝 자에는 ()’로 맺으며, 둘째 구 첫 자는 ()’자로 열어 끝 자는 ()’자로 닫으며, 그 가운데에 ()’자를 넣어 오행(五行)의 구색을 갖추는 것이다. 시골내기가 먼저 운을 뗀다.

 

萍蹤何處至 花月滿虛堂 부평 같은 자취 어드메서 이르렀나 꽃 달만 빈 집에 가득하도다.

 

두 구절의 첫 자 ()’()’는 머리에 ()’를 얻었으니, ‘()’에 속하고, ‘()’()’은 파자(破字)하여 아래 반을 취하면 ()’가 된다. 그러자 서울 것이 한참을 끙끙대다가, 겨우 한 구절을 잇고 4구를 마저 채우지 못한 채 손을 들고 말았다.

 

流影金樽照 흐르는 그림자 금술잔에 어리니

 

()’()’에 속하고 ()’()’로 받쳐져, 그 가운데 을 얹어 오행을 갖추었다. 하지만 4구가 빠졌으니 시 짓기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한 구절을 마저 잇지 못하자 시골내기가 다음 한 구절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瀅然飮白光 맑게 흰 빛을 마시는 도다.

 

()’가 들어 있고, ‘()’에서 나온다. ‘()’은 요령부득인데, 가만히 보니 음운이 ()’에 속한다. 기상천외의 재치로 시골내기가 서울 것에게 압승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요로원야화기는 단순하게는 갖은 시체(詩體)를 놓고 두 선비가 각축을 벌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거들먹거리는 서울 것을 KO시킬 만큼의 시재(詩才)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시골내기는 청운(靑雲)의 벼슬길에 명함 한 번 내밀어 보지 못했고, 전전하는 여관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이었다. 모처럼 서울 것 하나가 제대로 걸려 분풀이는 했지만, 뒷맛은 언제나 씁쓸하다.

 

 

 

 

인용

목차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2. 눈물이 석 줄

3. 김삿갓은 없다

4.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5. 한시 최후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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