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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5. 한시 최후의 광경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5. 한시 최후의 광경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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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

 

 

해체시는 전통미학과 기존문화를 해체하고 기존의 인간관도 해체시키려는 일종의 무규범성으로서의 소외 양상이었다. 해체시는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세계에 대한 불신을 효과적으로 표명했다. 욕설, 야유, 아이러니의 비틀린 언어도 소외의 주목할 만한 시적 양상이다. -115

 

 

可憐門閥皆佳族 슬프다 문벌은 모두 훌륭한 집안으로
虛老風塵獨可悲 세월에 헛되이 늙으니 홀로 구슬프도다.
五老峯下論理坐 오로봉 아래에서 이치 논하며 앉았자니
世人皆稱道也知 세상사람 모두 도를 안다 일컫네.

 

위 시는 한중기문(閒中記聞)에 실려 있다. 한 사람이 시덥잖은 제 집안과 학문을 지나치게 뽐내므로 임제(林悌)가 조롱하여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노봉(五老峯) 아래에서 리()를 논하며 앉아 있는 늙은이가 있다. 훌륭한 문벌의 자손으로, 이제는 영락해서 늙고 고단한 인생이다. 이야기야 예전 좋은 시절 조상 자랑이거나, 그렇고 그런 도학(道學) 이야기일 테지만, 영문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도인(道人)으로 일컬으며 높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몰락한 양반님네의 안쓰러운 허세를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독음으로 읽어야만 본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可憐門閥개가죽 슬프다 문벌은 모두 개가죽이요
虛老風塵도깨비 세월에 헛되이 늙은 도깨비로다.
五老峯下노루 오로봉 아래에 노루가 앉았는데
世人皆稱도야지 세상 사람 모두들 도야지라 일컫네.

 

모두 훌륭한 족속[皆佳族]’이 사실은 개가죽이었고, ‘홀로 구슬프도다[獨可悲]’를 독음으로 읽으니 도깨비가 되었다. ‘이치를 논함[論理]’는 들짐승 노루가 되고, ‘도를 안다[道也知]’는 기실 도야지즉 돼지였을 뿐이다. 도대체 문벌이니 도학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개가죽이요 도깨비 같이 허상만 있고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빈껍데기가 아니던가. 노루를 보고 도야지라 하는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또 어떠한가. 시인은 기실 그를 아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운 것이 아니라 돼지 같은 놈이라고 욕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이언총림(俚諺叢林)에는 오성 이항복이 지었다는 시가 실려 있다.

 

今朝借乘남의 오늘 아침 남의 수레를 빌려 타다
忽然落地꼭뒤 홀연히 떨어져서 뒤꼭지가 깨졌네.
長安大道에에 장안 큰 길에서 에고에고 울자니
世人皆稱미치 세상사람 모두다 미치광이라 하더라.

 

우리말과 한자를 뒤섞어서 칠언절구를 지었다. 가만히 보니 중간의 한글을 덜어내도 의미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중간에 한글을 끼워 말씹는 재미를 더했다.

 

 

우리말과 한자를 뒤섞어 쓰는 시는 구한말에 오면 다음과 같이 진전된다.

 

舍廊곗집處女在 사랑 문간에 처녀가 있는데
무던顔色가는 무던한 얼굴에다 가녀린 허리.
사람一見얼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얼른 숨으니
마치雲間月明消 마치 구름 사이 달이 숨는 듯.

 

이기(李沂, 1848~1909)대한자강회월보에 소개한 것이다. 앞에서는 구절마다 한글이 2자씩 일정한 위치에 들어갔는데, 여기서는 2자 또는 4자까지 들어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구문을 만들어낸다.

 

그 사이에 김삿갓의 데걱데걱등남산(登南山), 씨근벌떡식기산(息氣散). 醉眼朦朧굽어관(), 울긋불긋화난만(花爛漫)”이나, “청송(靑松)등성듬성립(), 인간(人間)여기저기유(). 소위(所謂)엇뚝빗뚝객(), 평생(平生)쓰나다나주()”와 같은 작품들이 또 있으니, 대개 이러한 파격시도 어느 순간 평지돌출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의 집적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시의 해체가 종당에 가면 아예 한글로 한시를 짓는 이른바 언문풍월로까지 발전한다. 언문풍월은 예전 주로 궁녀들이 한시의 작법을 응용하여 나름의 규칙을 세워 짓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김삿갓의 시에도 를 운자로 해서 사방기둥붉어타, 석양행객시장타. 네절인심고약타와 처럼 3구가 낙구된 채로 전해지는 언문풍월이 있다. 그러나 언문풍월이 본격적인 창작을 보게 된 것은 개화기에 와서인데, 1900년대에는 거의 시조문학과 경쟁관계를 유지할 만큼 기세를 떨쳤다. 여러 잡지에서는 운자와 제목을 주고 현상공모를 하고, 응모작 중에 가작 수백 편을 모아 언문풍월(諺文風月)이란 책을 출판하는 성황을 이루기까지 했던 것이다. 언문풍월은 쉽게 말해 기존 한시의 작법을 패로디하여 만든 국문시가이다. 다음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작품이다. 제목은 자명종이고, 운자는 가나다이다.

 

 

두개바늘놀아가

글자마다치노나.

땅땅치는그소리

늙을로자부른다.

 

 

큰 바늘 작은 바늘이 쉬지 않고 돌면서 정시마다 종을 쳐댄다. 그 소리는 마치 늙음을 재촉하는 소리로만 들린다는 재치다. 124구의 끝에 운자를 차례대로 달았다.

 

 

참대붙인종이가

흔들면은바람나

몹시더운여름에

친한벗이네로다

 

 

제목은 부채과 운자는 역시 가나다이다. 운자가 언제나 가나다인 것은 아니다.

 

 

명주비단고운올

요리조리가는골

어김없는네로다

좋은솜씨지은솔

 

 

제목은 바늘이고, 운자는 올골솔이다. 올이 고운 명주비단에 요리조리 골을 내어 바느질을 하고 나니 솔기마다 솜씨가 정갈하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언문풍월은 일상적인 여러 소재들을 가지고 운자에 있어서도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까지 다양하게 창장되고 있다. 특히 이것은 한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 재치만으로도 창작이 가능했으므로, 특정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작가층을 가졌다는데서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이 시기에 와서 한시는 이제 더 이상 감당해 낼 역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가져오고, 내용의 변모로도 의식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을 때 형식이 변한다. 기존 한시의 굳건한 문법은 개화기의 발랄한 실험정신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체의 양식들을 선보였다. 다만 그것이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 되지 못한 결과, 새로운 형식들은 일과성의 장난기로 그치고 말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이 시사하는 바는 심장하다. 해체주의의 80년대를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이 공룡처럼 다가와 있는 오늘의 시단에서도 새로운 담론의 방식에 대한 모색은 활발히 계속되고 있다. 기존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의 문법을 찾아 나서려는 노력도 힘차다. 그러나 시의 새로운 말하기 방식이 그 실험적 의도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인식하는 시대정신이나,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 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희필의 붙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잡체시나 파격시가 오늘의 시단에 던지는 의미는 여전히 생생하다.

 

 

 

 

인용

목차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2. 눈물이 석 줄

3. 김삿갓은 없다

4.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5. 한시 최후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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