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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 10. 동문서답의 선시들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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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 10. 동문서답의 선시들⑤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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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문서답의 선시들

 

 

다음은 고려 때 최유청(崔惟淸)잡흥(雜興)이다.

 

春草忽已綠 滿園蝴蝶飛 봄풀이 어느덧 저리 푸르러 동산 가득 나비가 날아다닌다.
東風欺人垂 吹起床上衣 봄바람 잠든 나를 속여 깨우려 침상 위 옷깃을 불어 흔드네.
覺來寂無事 林外射落暉 깨고 보면 고요히 아무 일 없고 숲 밖엔 저녁 해만 비치고 있다.
依檻欲歎息 靜然已忘機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려다 고요히 어느새 기심(機心) 잊었네.

 

봄볕이 따스해 혼곤한 낮잠에 빠졌다. 자는데 누가 자꾸 일어나라고 옷깃을 흔들어 깨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스스 일어난다. 일은 무슨 일, 봄바람의 공연한 장난이다. 밖을 내다보니 그게 아니다. 숲밖에는 저물녘 햇살이 빗겨있고, 봄 동산엔 풀빛이 벌써 짙었다. 꽃 찾는 나비는 햇살을 등에 안고 훨훨 날아다닌다. 봄바람이 나를 골렸던가? 그렇지 않다. 저걸 좀 보라고, 저 아름다운 광경을 곁에 두고 어찌 잠만 쿨쿨 자느냐고 날 깨운 것이다. ! 아름답다. 나도 몰래 감탄사가 내 입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사(四圍)가 고요해지며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연명이 득의망언(得意忘言) 한 것을, 최유청은 정연망기(靜然忘機)’했다. 고요히 서서 사물을 바라보다가, 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내가 되는, 나비가 장주가 되고, 장주가 나비가 되는 물아일체의 황홀경을 맛보았다. 이런 점에서 두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같다. 선시는 이렇듯 언어가 끊긴 자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유재영의 오월에서도 그런 흔적을 본다.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마당에 핀 상추꽃을 보는 5월의 아침은 싱그럽다. 자벌레 한 마리가 활처럼 제 몸을 굽혔다가 쭉 펴고, 굽혔다가 쭉 펴며 지구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시인은 자꾸만 간지럽다고 말하는데, 정작 간지러운 것은 지구의 안쪽인가? 아니면 시인 자신인가? 조그만 자벌레가 지구를 간지럽힌다. 이 놀라운 깨달음 앞에 세계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해진다.

 

다시 이런 시는 어떤가? 고려 때 혜심(慧諶)대영(對影)이란 작품이다.

 

池邊獨自坐 池底偶逢僧 연못 가 홀로 앉아 연못 속 중 만났지.
黙黙笑相視 知君語不應 묵묵히 보며 웃네 대답 않을 줄을 알고.

 

못가에 혼자 앉아 있는데, 못 속에서 웬 중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 싱거워 내가 씩 웃자, 그도 따라 웃는다. 누구신가? 물으려다 입을 다문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인들 그를 알겠는가? 두 사람은 그저 바라만 본다. 내가 그를 본다. 그도 나를 본다. 내가 나를 본다. 그가 그를 본다. 독자상시(獨自相視), 혼자 앉아 마주 본 이야기다.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쓴 시다.

 

선이란 때로 이렇듯 무심한 자기 응시이기도 하다. 일체의 이런 저런 분별을 걷고, 하루에도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걷어내면 그 안에 텅빈 물건이 하나 남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선시는 그 텅빈 물건 하나를 앞에 두고 부지런히 닦기도 하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닦을 먼지가 있기나 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3. 학시와 학선의 원리

4. 학시와 학선의 원리

5. 학시와 학선의 원리

6. 동문서답의 선시들

7. 동문서답의 선시들

8. 동문서답의 선시들

9. 동문서답의 선시들

10. 동문서답의 선시들

11. 달마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연명은 선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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