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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20. 선시, 깨달음의 표정 -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0. 선시, 깨달음의 표정 -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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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시가 선과 만나 선시(禪詩)가 된다. 시가 선의 경지에 이르면 시선(詩禪)이다. 시와 선은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자주 한 자리에서 거론되는가?

 

송나라 때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도(禪道)는 오직 묘오(妙悟)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에 달려 있다고 하여, 시와 선을 나란히 보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시와 선의 공통점을 묘오(妙悟)’로 들었다. 묘오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이다. 시를 잘 쓰는데 필요한 것은 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떨리듯 다가오는 묘오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을 얼마만큼 읽었는지는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다. 이치로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을 노래하는 것이다. 성당(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뭐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마치 허공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속에 비친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夫詩, 有别材, 非關書也; 詩有别趣, 非關理也. 然非多讀書多窮理, 則不能極其至, 所謂不渉理路不落言詮者, 上也. 詩者, 吟咏情性也, 盛唐諸人. 惟在興趣, 羚羊掛角, 無迹可求. 故其妙處, 透徹玲瓏, 不可湊泊, 如空中之音, 相中之色, 水中之月, 鏡中之象, 言有盡而意無窮.

 

 

좋은 시는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 따져 되는 것이 아니다. 상승의 시인들은 시에서 흥취를 추구한다. 흥취는 영양괘각(羚羊掛角)과 같다고 했다. 뿔이 둥글게 굽은 영양은 잠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려고 점프를 해서 뿔을 나무에 걸고 매달려 잔다. 영양의 발자국만 보고 쫓아온 사냥꾼은 영양의 발자국이 끝난 곳에서 영양을 놓친다. 영양은 어디에 있는가? 발자국이 끝난 지점에 있다. 허공에 걸려 있다. 한편의 시가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시인의 말이 끝난 지점에 의미는 걸려 있다.

 

옛 선사들의 선문답도 이와 다를 게 없다. 큰 깨달음은 자취가 없다. 허공의 소리는 내 귀에 또렷히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물 위에 뜬 달은 분명히 있지만 실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달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있으면서 없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인다. 이것이 엄우가 말하는 흥취요 묘오다.

 

이후 중국 비평론에서 시와 선을 나란히 놓고 설명하는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원호문(元好問)은 이렇게 말했다.

 

詩爲禪客添錦花 시는 선객(禪客)에게 비단 위 꽃이 되고
禪是詩家切玉刀 ()은 시가(詩家)의 옥 자르는 칼이라네.

 

선객은 참선 중에 깨달은 미묘한 소식을 시의 형식을 빌어쓴다. 금상첨화(錦上添花). 시인은 선의 사고방식을 배워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로 전달한다. 절옥도(切玉刀)가 따로 없다. 명나라 보하(普荷)시선편(詩禪篇)에서 또 이렇게 설명했다.

 

禪而無禪便是詩 선이면서 선 없어야 그제서 시가 되고
詩而無詩禪儼然 시 속에 시 없을 때 선이 또한 엄연하다.

 

참 알쏭달쏭한 말이다. 선과 시는 애초에 길이 다르다. 선이 시가 아니고, 시도 선은 아니다. 하지만 그속에 닮은 점이 있다. 표현하는 세계나 도달하는 궁극은 달라도, 방법은 흡사하다. 선이면서 선이 없어야 시라는 말은, 선의 방법을 빌어오되 선에 함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시이되 시를 벗어나야 선이란 말은, 어쩔 수 없이 시를 빌어 선을 말하지만, 시가 곧 선일 수는 없음을 명백히 깨달으라는 주문이다.

 

 

선과 시는 왜 넘나드는가? 시와 선을 하나로 보는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사고는 선학(禪學)이 일어난 송나라 이후에 활발해지지만, 일찍이 당나라 두보(杜甫)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 지을 때 용사(用事)는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 물속에 소금이 녹은 것은 물을 마셔보아야 짠맛을 안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나온다. 물속에 녹은 소금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셔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다. 꼭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너무도 또렷하다. 시와 선은 이 지점에서 만난다.

 

당나라 때 시승 제기(齊己)기정곡낭중(寄鄭谷郞中)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詩心何以傳 所證自同禪 시심(詩心)을 무엇으로 전할 수 있나 증명함이 절로 선과 같구나.

 

시인이 제 마음에 뭉게뭉게 일어난 생각을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은 선사가 참선 중의 깨달음을 선문답으로 전달하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당나라 천주숭혜선사(天柱崇慧禪師)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시구를 가지고 선문답을 진행해 보인다. 문답은 이렇다.

천주(天柱)의 가풍은 어떠합니까?”

 

時有白雲來閉戶 흰 구름 때로 일어 와서 문을 닫으니,
更無風月四山流 풍월(風月)도 다시 없고 사방 산만 흘러가네.

 

제가 죽은 뒤에는 어떤 거처로 향해 갑니까?”

 

潛岳峯高長積翠 잠긴 뫼 높은 봉은 노상 푸름 쌓여있고
舒江明月色光輝 강에 퍼진 밝은 달은 그 빛깔 휘황하다.

 

도란 과연 무엇입니까?”

 

白雲覆靑嶂 蜂鳥步庭華 흰 구름 푸른 뫼를 덮어 감싸고 벌과 새 뜨락 꽃을 돌아다닌다.

 

요령부득의 동문서답이다. 깨달음의 모습을 묻는데, 푸른 산을 덮은 흰 구름과 꽃을 찾아다니는 벌과 새를 말한다. 죽은 뒤에 어찌 되느냐고 묻자, 산은 푸르고 달빛은 밝다고 대답한다. 가풍을 묻는 말에는 흰 구름이 와서 문을 닫으면, 바람도 달도 없이 사방 산만 흘러간다고 한다. 알 듯 말 듯 묘한 말씀이다.

 

 

선의 어떤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후로 여러 문헌에 자주 등장했다. 고려 때 선승 경한(景閑)도 그의 어록에서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어떤 중이 내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아득히 강남 땅 2,3월을 생각하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롭네[遙憶江南三二月, 鷓鴣啼處百花香].”라고 대답하겠다. 또 어떤 중이 내게 조사(祖師)께서 동쪽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딘 해에 강과 산은 곱기도 한데,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구나[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라고 대답하거나, “산꽃이 활짝 피니 비단 같은데, 시냇물은 쪽빛도곤 더욱 푸르다[山花開似錦, 澗水碧於藍].”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싯귀들은 모두 조사선(祖師禪)으로 빛깔과 소리와 언어를 갖춘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데, 꽃이 피고 새가 운다고 대답한다. 시냇물은 푸르고 꽃과 풀은 향기롭다고 딴청 한다. 따져서 알려들지 말라. 그냥 그대로 숨 쉬듯 느껴라. 무슨 말이냐고 묻지 말라. 몽둥이와 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 때 이지의(李之儀)여이거인(與李去言)에서 ()을 말하는 것과 시를 짓는 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說禪作詩, 本無差別].”고까지 말했다. 북송의 시인 오가(吳可)는 이런 관점에서 시를 배우는 방법을 참선에 견준 학시시(學詩詩)이란 제목의 시 세 수를 남겼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竹榻蒲團不計年 대 걸상 부들자리 햇수를 따지잖네.
直待自家都了得 스스로 온전히 깨침 얻기 기다려
等閑拈出便超然 멋대로 읊조려도 문득 우뚝 하리라.

 

요컨대 학시(學詩)와 학선(學禪)은 한 가지 원리라는 것이다. 누가 오래 시를 썼고, 누가 더 도를 닦았느냐 하는 것은 깨달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시쳇말로 짬밥수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자가(自家)의 요득(了得), 즉 한 소식을 깨쳤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에 달렸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읊조려도 절창 아닌 것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설법 아닌 것이 없다.

 

둘째 수는 이렇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頭上安頭不足傳 머리 위에 머리 얹음 전할 것 족히 없네.
跳出少陵窠臼外 두보(杜甫)의 굴레 밖을 뛰쳐서 나와야만
丈夫志氣本冲天 대장부의 뜻과 기운 하늘에 솟구치리.

 

2구의 두상안두(頭上安頭)’는 옥상가옥(屋上加屋)과 같은 말이다. 남의 집 위에 집 짓지 말고, 있는 머리 위에 머리 얹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逢佛殺佛, 逢祖殺祖]. 두보(杜甫)의 시가 제 아무리 훌륭해도, 두보의 꽁무니만 따라가다 보면 죽도록 시를 써도 두보 비슷한 시만 있지 내 시는 없다. 권위에 기대지 말고 장부의 충천하는 지기(志氣)를 떨쳐라. 백 날 천 날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다 해서 선기(禪機)가 절로 열리는 법은 없다.

 

 

다시 이어지는 셋째 수이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自在圓成有幾聯 자재롭고 원성(圓成)함 몇 연이나 있었던고?
春草池塘一句子 사령운(謝靈運)의 지당춘초(池塘春草) 한 구절이 나오자
驚天動地至今傳 천지가 놀라 떨며 지금껏 전하누나.

 

수많은 학구(學究)들이 참선으로 득도의 길을 찾아 나서지만, 활연대오(豁然大悟)의 소식을 통통쾌쾌(痛痛快快)하게 깨치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 깨친 척하는 가짜들과 깨달음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엉터리들이 뜻 모를 공안(公案) 몇 개 들고 앉아 대중을 우롱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앞에 서면 가짜는 오금도 펴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재원성(自在圓成)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느 것 하나 걸림 없이 원만하다. 숨 쉬고 밥 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사령운(謝靈運)등지상루(登池上樓)란 시에서 연못에 봄풀이 돋아나오고, 정원버들 우는 새 바뀌었구나[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란 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봄이 되니 봄풀이 돋아나고, 버들개지에 물오르니 꾀꼬리의 목청이 변한다. 마치 밥 먹으니 배부르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이 무덤덤한 구절을 두고, 역대로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송나라 때 섭몽득(葉夢得)석림시화(石林詩話)에서 이 구절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기막힌 줄을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대개 기이한 것만 가지고 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교묘한 점은 바로 아무 의도 없이 느닷없이 경물과 서로 만나, 이를 빌어 글을 이루고, 갈고 다듬을 겨를조차 없었던 데 있다. 보통의 정으로는 능히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시가(詩家)의 묘처는 모름지기 이것을 가지고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괴롭게 끙끙대고 어려운 것만 말하는 자들은 대체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가(吳可)학시시(學詩詩)세 수에서, 참선의 비유를 들어 시학의 근본 원리를 설파했다. 그 핵심은 자가료득(自家了得)’도출과구(跳出窠臼)’, 그리고 자재원성(自在圓成)에 있다. 즉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전범(典範)에 붙들리지 말며, 툭 터져 자재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그러자 이번에는 송나라 공성임(龔聖任)이 이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語可安排意非傳 말이야 안배해도 뜻은 못 전한다네.
會意卽超聲律界 깨우치면 그 즉시 성률 따윈 내던져서
不須煉石補蒼天 달군 돌로 하늘 구멍 막아서는 안 되지.

 

말을 매만져 표현을 가다듬는 것이 시가 아니다. 포단(蒲團) 위에 앉아 독경 소리 가다듬는 것이 참선이 아닌 것과 같다. 마음에 문득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토해내야 한다. 성률(聲律)이니 계율(戒律)이니에 얽매이지 마라. 뜻이 없이는 성률도 없다. 깨달음이 없이는 시도 선도 없다. 하늘에 큰 구멍이 뻥 뚫렸다고 돌멩이 가져다가 막을 생각은 말아라.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구차미봉(苟且彌縫) 하느니 붓을 꺾고 종이를 찢어, 혀를 물고 죽는 것이 낫다. 시와 선은 이렇게 해서 한 자리에서 만난다.

 

김석신(金碩臣), 고승한담도(高僧閑談圖), 18세기, 36X31cm, 개인소장.

감도 없고 옴도 없다. 텅 비었고 꽉 찼다. 나는 누군가? 너는 누구냐!

 

 

 

인용

목차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3. 동문서답의 선시들

4. 달마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연명은 선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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