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문서답의 선시들②
의미가 도처에서 단절된 것은 현대시 속에도 있다. 이승훈의 「너」를 읽는다.
캄캄한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만났을 때도 캄캄했다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났고 캄캄한 밤 허공에 글을 쓰며 살았다 오늘도 캄캄한 대낮 마당에 글을 쓰며 산다 아마 돌들이 읽으리라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나,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허공에 글을 써왔다. 오늘은 캄캄한 대낮 마당에 글을 쓴다. 내 글은 돌들이 읽을 것이다. 역시 요령부득이다. 시인은 ‘그리고’라고 말해야 할 때 ‘그러나’를 말하고, ‘오늘은’ 하지 않고 ‘오늘도’라고 말한다. ‘캄캄한 밤 허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캄캄한 대낮 마당’으로 미끌어진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허공에 쓴 글은 쓰나마나 한 글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만난 너는 만나나 마나한 존재다. 만나나 마나 한 존재를 위해 쓰나마나한 글을 쓰며 살았다. 무슨 말인가? 너는 누구인가? 왜 내가 쓴 글을 ‘너’가 읽지 않고 돌들이 읽는가? 이런 언어 앞에 의미화의 노력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음은 이성선의 「뿔을 물어뜯다」이다.
진흙 묻은 소가
빗줄기 몇 가닥에 목을 씻고 지나간다
번개 짐승이
달려들어 소의 뿔을 물어뜯는다
깜깜한 지상
연꽃 피는 소리 들린다
진흙 묻은 소가 빗속을 지나가자 짐승 같은 번개가 소뿔을 물어뜯고, 그 서슬에 깜깜한 지상에선 연꽃이 핀다. 참 희한한 말이다. 동사만 연결해서, 지나가는데 물어뜯더니 소리 들린다로 읽으면, 각각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뚱딴지같이 결합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이 세상이 이렇듯 보이지 않는 유기체적 질서 속에 배열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깜깜한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연꽃이 피어나는 그 소리만큼은 번개가 소뿔을 물어뜯듯이 장엄하기 그지없다. 이런 것이 선시다.
그렇다고 선시가 늘 이렇게 반상합도(反常合道)의 넌센스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말 안 되는 내용을 담은 시만을 선시로 이해하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종종 초현실주의 시에 선시를 견주기도 하는데,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언어의 일상 궤도를 이탈했다는 점뿐이다. 진짜 선시는 말장난에 머물지 않는다. 때로 선시가 말장난의 외양을 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인용
2. 학시와 학선의 원리①
3. 학시와 학선의 원리②
4. 학시와 학선의 원리③
5. 학시와 학선의 원리④
6. 동문서답의 선시들①
7. 동문서답의 선시들②
8. 동문서답의 선시들③
9. 동문서답의 선시들④
10. 동문서답의 선시들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