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언어란 본래 부질없는 도구다.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남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툭하면 오해를 낳고, 곁길로 샌다. 옛 시인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노래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언불진의(言不盡意), 말은 뜻을 다 전달할 수 없다. 이 생각은 옛 사람들을 늘 절망케 했다. 말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뜻, 말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는 늘 언어를 저만치 벗어나 있다. 수레 깎던 윤편(輪扁)은 제 자식에게조차 그 기술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주역(周易)』의 대답은 ‘입상진의(立象盡意)’다. 말로 하려들지 말고, 이미지를 들러리로 세워서 설명하면 그 뜻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은 말을 낳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사물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저 사물을 시켜서 보여주기만 해도 된다. 그렇게 하면 못 알아들을 말이 하나도 없게 된다. 애시당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리 친절하게 일러줘도 소용이 없다. 알아들을 사람은 명료하게 찔러주는 이 이미지의 길을 따라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깨닫는다. 이른바 직절근원(直截根源)이다.
수도(修道)의 길에서 문득 만난 한소식을 언어로 옮겨 놓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삶의 자리마다 홀연 다가서는 깨달음을 말로 설명하기도 난감하다. 하지만 그 황홀한 찰나의 소식을, 격정적으로 튀어나오는 환희의 법열을 혼자만 알고 있기는 더 벅차다. 그래서 선시(禪詩)가 나오고 오도송(悟道頌)이 나왔다. 무언가 말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나온 말씀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시시콜콜한 설명이나 조분조분한 길 안내의 겨를은 없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고,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세계도 없고, 없는 것도 없는 끝의 자리에서 나온 언어가 깨달음의 언어다. 천사만려(千思萬慮)가 마음을 떠나자, 허령불매(虛靈不眛)의 여여(如如)한 본성이 드러난다. 이언절려(離言絶慮),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긴 자리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때 터져 나오는 언어는 말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옥(李鈺, 1760~1815)은 「이언(俚諺)」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있어 시킨 것이다. 이를 지은 자가 어찌 감히 지었겠는가? 이를 지은 자에게 이를 짓게끔 만든 사람이 지은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천지만물이다. 천지만물은 작가에게 있어, 꿈에 의탁하여 현상으로 드러났다가 다른 형상으로 변화하여 정을 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천지만물이 사람의 힘을 빌어 시를 지으려 할 때는 귓구멍과 눈구멍으로 쏙 들어와 단전 위를 배회하다가, 입과 손을 통해 술술 나오는 것이니, 본래 시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는 마치 석가모니가 어쩌다 공작의 입을 통해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금세 공작의 뒷 꽁무니를 통해 다시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을 석가모니의 석가모니라 해야 할지, 공작의 석가모니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천지만물의 통역관이라 하고, 또 천지만물을 그려내는 화가라고 하는 것이다.
是非我也, 有主而使之者. 作之者, 安敢作也? 所以爲作之者之所作者, 作之矣. 是誰也? 天地萬物, 是已也. 天地萬物, 有天地萬物之性, 有天地萬物之象, 有天地萬物之色, 有天地萬物之聲.總而察之, 天地萬物, 一天地萬物也; 分而言之, 天地萬物, 各天地萬物也. 風林落花, 雨樣紛堆, 而辨而視之, 則紅之紅, 白之白也; 勻天廣樂, 雷般轟動, 而審而聽之, 則絲也絲, 竹也竹. 各色其色, 各音其音. 一部全詩, 出稿於自然之中, 而已具於畫八卦造書契之前矣. 此國風樂府詞曲者之所不敢自任, 不敢相襲也. 天地萬物之於作之者, 不過托夢而現相, 赴箕而通情也. 故其假於人, 而將爲詩也, 溜溜然從耳孔眼孔中入去, 徘徊乎丹田之上, 續續然從口頭手頭上出來, 而其不干於人也. 若釋迦牟尼之偶然從孔雀口中入腹, 須臾向孔雀尻門復出也. 吾未知釋迦牟尼之釋迦牟尼耶? 是孔雀之釋迦牟尼耶? 是故, 作之者, 天地萬物之一象胥也, 亦天地萬物之一龍眠也.
시를 쓴 것은 시인이지만, 그가 한 일이라곤 천지만물의 이야기를 대신 통역해준 구실 뿐이다. 그는 입 없는 천지만물을 대신해 그 말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여주는 자다. 똥을 눈 것은 공작이지만, 그 똥은 공작새의 똥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똥이라는 말이다.
선사(禪師)들이 벽력같은 깨달음의 순간에 설명의 언어를 버리고 입상진의의 시를 선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하다. 언어의 길, 생각의 길은 백척간두의 절벽 앞에서 이미 끊어졌다. 생각이 끊기고 보니 내가 없다. 이때 잠시 천지만물이 내 텅 빈 단전 사이로 스며들어 맴돌다가, 내 손을 빌리고 내 입을 빌려 언어의 외양으로 형상화 된 것이 선시(禪詩)다.
불법의 대의를 묻는 제자에게 30방의 몽둥이찜질을 날리던 덕산(德山)이나, 간이 콩알 만해 지도록 할(喝)을 내지르던 임제(臨濟)도 속으로는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무언가 설명해주고 싶은데 언어의 길은 막혔고, 속 시원히 뚫어주고 싶은데 문종이만 계속 들이박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 뚱딴지같은 선문답(禪問答) 놀이를 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은 하도 안타까워 나온 소리지, 이 안에 무슨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이 아니다. 말로 일러주면 언전(言筌) 즉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고, 이치로 설명하면 이로(理路)에서 길 잃고 헤맨다. 그러니 언어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으래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하기야 시론 책 읽고 시인 되는 법도 있던가?
인용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3. 동문서답의 선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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