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달마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연명은 선을 아네
이 글은 두 가지를 말했다.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살폈고, 선시의 세계를 조금 맛보았다. 이 두 가지는 조금 층위가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선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굳이 다를 것도 없다. 시의 생각과 선의 사고는 무던히도 닮았다. 시인과 선객은 자주 가깝게 왕래한다. 서로 말귀가 통하고 배짱이 맞기 때문이다. 선방에 가짜 선객이 많듯이 시단에 가짜 시인이 많은 것도 같다. 대충 비슷하게 흉내 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앞에서는 둘 다 꼼짝도 못한다. 숨도 쉴 수 없다.
시와 선이 하나로 만나 선시가 된다. 절묘한 결합인 셈이다. 선시의 언어는 직관의 언어다.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한다. 풍경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직관의 언어는 무책임하다. 친절하기는커녕 때로는 소통 자체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선시는 종종 오해되고 있다. 그저 말 안 되는 뚱딴지 소리만 선시로 말해서는 안 된다. 승려가 지은 시를 모두 선시라 할 수도 없다. 『벽암록』과 『전등록』이 선시를 읽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아니다. 구름을 잡는 소리를 해야만 선시라고 착각하지 말라. 선시도 일상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다 선이다. 마삼근(麻三斤)이 부처이고, 야반 삼경의 문고리가 스승의 유체(遺體)다. 선시는 깨달음 없는 삶, 생존의 나날을 혐오한다.
송나라 시덕조(施德操)는 『북창영과록(北窓炙顆錄)』에서 앞서 본 도연명의 「음주」시를 읽고 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때는 달마가 아직 중국에 오지도 않았는데, 도연명은 이미 선(禪)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너무도 통쾌해서 덩실 춤을 추었다.
인용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3. 동문서답의 선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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