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학시와 학선의 원리④
다시 이어지는 셋째 수이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
自在圓成有幾聯 | 자재롭고 원성(圓成)함 몇 연이나 있었던고? |
春草池塘一句子 | 사령운(謝靈運)의 지당춘초(池塘春草) 한 구절이 나오자 |
驚天動地至今傳 | 천지가 놀라 떨며 지금껏 전하누나. |
수많은 학구(學究)들이 참선으로 득도의 길을 찾아 나서지만, 활연대오(豁然大悟)의 소식을 통통쾌쾌(痛痛快快)하게 깨치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 깨친 척하는 가짜들과 깨달음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엉터리들이 뜻 모를 공안(公案) 몇 개 들고 앉아 대중을 우롱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앞에 서면 가짜는 오금도 펴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재원성(自在圓成)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느 것 하나 걸림 없이 원만하다. 숨 쉬고 밥 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사령운(謝靈運)은 「등지상루(登池上樓)」란 시에서 “연못에 봄풀이 돋아나오고, 정원버들 우는 새 바뀌었구나[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란 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봄이 되니 봄풀이 돋아나고, 버들개지에 물오르니 꾀꼬리의 목청이 변한다. 마치 밥 먹으니 배부르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이 무덤덤한 구절을 두고, 역대로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송나라 때 섭몽득(葉夢得)은 『석림시화(石林詩話)』에서 이 구절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기막힌 줄을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대개 기이한 것만 가지고 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교묘한 점은 바로 아무 의도 없이 느닷없이 경물과 서로 만나, 이를 빌어 글을 이루고, 갈고 다듬을 겨를조차 없었던 데 있다. 보통의 정으로는 능히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시가(詩家)의 묘처는 모름지기 이것을 가지고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괴롭게 끙끙대고 어려운 것만 말하는 자들은 대체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가(吳可)는 「학시시(學詩詩)」 세 수에서, 참선의 비유를 들어 시학의 근본 원리를 설파했다. 그 핵심은 ‘자가료득(自家了得)’과 ‘도출과구(跳出窠臼)’, 그리고 ‘자재원성(自在圓成)에 있다. 즉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전범(典範)에 붙들리지 말며, 툭 터져 자재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그러자 이번에는 송나라 공성임(龔聖任)이 이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
語可安排意非傳 | 말이야 안배해도 뜻은 못 전한다네. |
會意卽超聲律界 | 깨우치면 그 즉시 성률 따윈 내던져서 |
不須煉石補蒼天 | 달군 돌로 하늘 구멍 막아서는 안 되지. |
말을 매만져 표현을 가다듬는 것이 시가 아니다. 포단(蒲團) 위에 앉아 독경 소리 가다듬는 것이 참선이 아닌 것과 같다. 마음에 문득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토해내야 한다. 성률(聲律)이니 계율(戒律)이니에 얽매이지 마라. 뜻이 없이는 성률도 없다. 깨달음이 없이는 시도 선도 없다. 하늘에 큰 구멍이 뻥 뚫렸다고 돌멩이 가져다가 막을 생각은 말아라.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구차미봉(苟且彌縫) 하느니 붓을 꺾고 종이를 찢어, 혀를 물고 죽는 것이 낫다. 시와 선은 이렇게 해서 한 자리에서 만난다.
인용
2. 학시와 학선의 원리①
3. 학시와 학선의 원리②
4. 학시와 학선의 원리③
5. 학시와 학선의 원리④
6. 동문서답의 선시들①
7. 동문서답의 선시들②
8. 동문서답의 선시들③
9. 동문서답의 선시들④
10. 동문서답의 선시들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