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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 8. 동문서답의 선시들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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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 8. 동문서답의 선시들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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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문서답의 선시들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선시를 몇 수 보자. 김시습(金時習)증준상인(贈峻上人)20수 연작 중 제 8이다.

 

終日芒鞋信脚行 종일 짚신 신고 발길 따라 가노라니
一山行盡一山靑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푸르도다.
心非有想奚形役 마음에 생각 없으니 어찌 형상 부리며
道本無名豈假成 도는 본시 무명(無名)한데 어찌 거짓 이룰까.
宿露未晞山鳥語 간 밤 이슬 마르잖아 산새는 지저귀고
春風不盡野花明 봄 바람 그치잖아 들꽃은 피었구나.
短笻歸去千峯靜 지팡이로 돌아갈 때 천봉이 고요터니
翠壁亂烟生晩晴 푸른 절벽 짙은 안개 저녁 햇살 비쳐드네.

 

저 들판 끝난 곳이 그 바로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금 청산 밖에 있구나[平蕪盡處是靑山, 行人更在靑山外].”의 탄식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로 시상을 열었다. 멀리 뵈는 청산을 목표 삼아 부지런히 걸었다. 발바닥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혀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리하여 막상 그 청산에 이르고 보니, 다시 저 멀리 지평선 끝에 또 다른 청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허망하기 그지없다.

 

인간 도처(到處)에 유청산(有靑山)인데, 청산의 끝은 찾아 무엇하겠는가? 34구에서 시인은 슬며시 속내를 드러낸다. 마음에 둔 집착 때문에 나는 내 몸을 괴롭혔다. 그 집착은 무엇이었던가? 도를 이루고 말겠다는, 성불하고 말겠다는 욕심이었다. 도는 원래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이루고 말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저 청산의 끝에 설 때 내 마음속에 품었던 도도 이루어지리라 믿은 내 집착은 헛된 미망(迷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끝은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세상이 5,6구다. 저 허공을 나는 새를 보아라. 누가 아침이 온 것을 일러주지 않아도 먼동이 트기 전에 먼저 깨어 새벽을 노래한다. 들판에 피는 꽃은 어떠한가? 봄바람이 끝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알아 꽃망울을 터뜨린다. 자연의 이법은 모두 이와 같은데, 인간은 반대로 하고, 억지로 한다. 그래서 발만 부르트고 몸만 괴롭다.

 

이제 그는 다시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온다. 시인은 산이 고요하다 했지만, 고요한 것은 사실 시인의 내면이다. 푸른 절벽은 예전 이 길을 거쳐 올 때 절망처럼 내 길을 막았었다. 짙은 안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방향을 잃고 헤매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욕심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길, 늦은 햇살이 비쳐들며 나를 괴롭히던 망집(妄執)의 실체를 극명하게 비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오도시(悟道詩).

 

다시 한 수 더 읽어 보기로 하자. 같은 제목의 시 제 10이다.

 

空色觀來色卽空 ()과 색() 살펴보면 색이 곧 공이거니
更無一物可相容 다시금 한 물건도 서로 용납함이 없네.
松非有意當軒翠 소나무 별 뜻 없이 집 앞에 푸르르고
花自無心向日紅 꽃은 절로 무심하게 해를 향해 붉게 폈다.
同異異同同異異 다름을 같다 하고 같음을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 같지 않고
異同同異異同同 같음을 다르다 하고 다름을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도다.
欲尋同異眞消息 같고 다른 진짜 소식 찾고자 한다면은
看取高高最上峯 높고 높은 최정상서 살피어 보시게나.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다. 사람들은 허실(虛實)을 따지고 득실(得失)을 헤아리느라 바쁘지만, 그 사이에는 조금의 틈도 없다. 무엇이 색이고 무엇이 또 공인가? 집 앞에 서서 사시장철 푸름을 뽐내는 소나무는 색인가? 잠시 피었다 금세 스러질 저 꽃은 공인가? 소나무와 꽃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이것은 나무요 저것은 꽃이니 다르다면 다르고, 이것은 오래 가고 저것은 잠깐 뿐이니 다르다면 다르다. 하지만 종당에는 다 시들고 베어지니 막상 다를 것도 없다.

 

56구는 공()과 색()의 자리에 동()과 이()를 넣어 장광설의 말장난을 늘어놓았다. 시비는 어디서 생기는가? 다른 것을 굳이 같다고 하고, 같은 것을 다르다 하는 데서 생긴다. 같을 것도 다를 것도 없는데, 분별하여 편 가르니 세상이 시끄럽다. 자연은 뜻 없이 무심한데, 유의(有意)한 인간들이 공연히 해석하느라 바쁘다. 같고 다름의 분별에 대해 알고 싶은가? 가장 높은 꼭대기로 가서 보라. 세상 만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 같고 다름이 대번에 판가름 나는 장소로 찾아가라.

 

 

김홍도,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 18세기, 20.8X28.7cm, 간송미술관

깡마른 정신 하나 들고 서방정토 향해 간다. 구름 위 연꽃 보좌에 앉았자니 눈앞이 환하다. 향기가 진동한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3. 학시와 학선의 원리

4. 학시와 학선의 원리

5. 학시와 학선의 원리

6. 동문서답의 선시들

7. 동문서답의 선시들

8. 동문서답의 선시들

9. 동문서답의 선시들

10. 동문서답의 선시들

11. 달마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연명은 선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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