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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 4. 학시와 학선의 원리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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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 4. 학시와 학선의 원리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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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시와 학선의 원리

 

 

선의 어떤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후로 여러 문헌에 자주 등장했다. 고려 때 선승 경한(景閑)도 그의 어록에서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어떤 중이 내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아득히 강남 땅 2,3월을 생각하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롭네[遙憶江南三二月, 鷓鴣啼處百花香].”라고 대답하겠다. 또 어떤 중이 내게 조사(祖師)께서 동쪽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딘 해에 강과 산은 곱기도 한데,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구나[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라고 대답하거나, “산꽃이 활짝 피니 비단 같은데, 시냇물은 쪽빛도곤 더욱 푸르다[山花開似錦, 澗水碧於藍].”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싯귀들은 모두 조사선(祖師禪)으로 빛깔과 소리와 언어를 갖춘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데, 꽃이 피고 새가 운다고 대답한다. 시냇물은 푸르고 꽃과 풀은 향기롭다고 딴청 한다. 따져서 알려들지 말라. 그냥 그대로 숨 쉬듯 느껴라. 무슨 말이냐고 묻지 말라. 몽둥이와 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 때 이지의(李之儀)여이거인(與李去言)에서 ()을 말하는 것과 시를 짓는 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說禪作詩, 本無差別].”고까지 말했다. 북송의 시인 오가(吳可)는 이런 관점에서 시를 배우는 방법을 참선에 견준 학시시(學詩詩)이란 제목의 시 세 수를 남겼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竹榻蒲團不計年 대 걸상 부들자리 햇수를 따지잖네.
直待自家都了得 스스로 온전히 깨침 얻기 기다려
等閑拈出便超然 멋대로 읊조려도 문득 우뚝 하리라.

 

요컨대 학시(學詩)와 학선(學禪)은 한 가지 원리라는 것이다. 누가 오래 시를 썼고, 누가 더 도를 닦았느냐 하는 것은 깨달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시쳇말로 짬밥수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자가(自家)의 요득(了得), 즉 한 소식을 깨쳤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에 달렸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읊조려도 절창 아닌 것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설법 아닌 것이 없다.

 

둘째 수는 이렇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頭上安頭不足傳 머리 위에 머리 얹음 전할 것 족히 없네.
跳出少陵窠臼外 두보(杜甫)의 굴레 밖을 뛰쳐서 나와야만
丈夫志氣本冲天 대장부의 뜻과 기운 하늘에 솟구치리.

 

2구의 두상안두(頭上安頭)’는 옥상가옥(屋上加屋)과 같은 말이다. 남의 집 위에 집 짓지 말고, 있는 머리 위에 머리 얹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逢佛殺佛, 逢祖殺祖]. 두보(杜甫)의 시가 제 아무리 훌륭해도, 두보의 꽁무니만 따라가다 보면 죽도록 시를 써도 두보 비슷한 시만 있지 내 시는 없다. 권위에 기대지 말고 장부의 충천하는 지기(志氣)를 떨쳐라. 백 날 천 날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다 해서 선기(禪機)가 절로 열리는 법은 없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3. 학시와 학선의 원리

4. 학시와 학선의 원리

5. 학시와 학선의 원리

6. 동문서답의 선시들

7. 동문서답의 선시들

8. 동문서답의 선시들

9. 동문서답의 선시들

10. 동문서답의 선시들

11. 달마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연명은 선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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