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학시와 학선의 원리③
선의 어떤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후로 여러 문헌에 자주 등장했다. 고려 때 선승 경한(景閑)도 그의 어록에서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어떤 중이 내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아득히 강남 땅 2,3월을 생각하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롭네[遙憶江南三二月, 鷓鴣啼處百花香].”라고 대답하겠다. 또 어떤 중이 내게 조사(祖師)께서 동쪽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딘 해에 강과 산은 곱기도 한데,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구나[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라고 대답하거나, “산꽃이 활짝 피니 비단 같은데, 시냇물은 쪽빛도곤 더욱 푸르다[山花開似錦, 澗水碧於藍].”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싯귀들은 모두 조사선(祖師禪)으로 빛깔과 소리와 언어를 갖춘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데, 꽃이 피고 새가 운다고 대답한다. 시냇물은 푸르고 꽃과 풀은 향기롭다고 딴청 한다. 따져서 알려들지 말라. 그냥 그대로 숨 쉬듯 느껴라. 무슨 말이냐고 묻지 말라. 몽둥이와 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 때 이지의(李之儀)는 「여이거인(與李去言)」에서 “선(禪)을 말하는 것과 시를 짓는 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說禪作詩, 本無差別].”고까지 말했다. 북송의 시인 오가(吳可)는 이런 관점에서 시를 배우는 방법을 참선에 견준 「학시시(學詩詩)」이란 제목의 시 세 수를 남겼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
竹榻蒲團不計年 | 대 걸상 부들자리 햇수를 따지잖네. |
直待自家都了得 | 스스로 온전히 깨침 얻기 기다려 |
等閑拈出便超然 | 멋대로 읊조려도 문득 우뚝 하리라. |
요컨대 학시(學詩)와 학선(學禪)은 한 가지 원리라는 것이다. 누가 오래 시를 썼고, 누가 더 도를 닦았느냐 하는 것은 깨달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시쳇말로 짬밥수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자가(自家)의 요득(了得), 즉 한 소식을 깨쳤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에 달렸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읊조려도 절창 아닌 것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설법 아닌 것이 없다.
둘째 수는 이렇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
頭上安頭不足傳 | 머리 위에 머리 얹음 전할 것 족히 없네. |
跳出少陵窠臼外 | 두보(杜甫)의 굴레 밖을 뛰쳐서 나와야만 |
丈夫志氣本冲天 | 대장부의 뜻과 기운 하늘에 솟구치리. |
2구의 ‘두상안두(頭上安頭)’는 옥상가옥(屋上加屋)과 같은 말이다. 남의 집 위에 집 짓지 말고, 있는 머리 위에 머리 얹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逢佛殺佛, 逢祖殺祖]. 두보(杜甫)의 시가 제 아무리 훌륭해도, 두보의 꽁무니만 따라가다 보면 죽도록 시를 써도 두보 비슷한 시만 있지 내 시는 없다. 권위에 기대지 말고 장부의 충천하는 지기(志氣)를 떨쳐라. 백 날 천 날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다 해서 선기(禪機)가 절로 열리는 법은 없다.
인용
2. 학시와 학선의 원리①
3. 학시와 학선의 원리②
4. 학시와 학선의 원리③
5. 학시와 학선의 원리④
6. 동문서답의 선시들①
7. 동문서답의 선시들②
8. 동문서답의 선시들③
9. 동문서답의 선시들④
10. 동문서답의 선시들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