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인행에 나타난 노인의 이야기
확실히 카페에서 하는 스터디는 강의실에서 하는 스터디와 느낌이 다르다. 느낌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았다. 첫째는 공간이 지닌 느낌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강의실은 애초에 배움을 전제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니 ‘잘 배워야 한다’는 중압감이 작용하기 마련이지만 카페는 그렇지 않다.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기에 맘이 저절로 누그러지는 것이다. 둘째는 도구의 배치에 있다. 강의실의 책걸상은 칠판을 향해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현격하게 나누어지게 된다. 물론 책걸상의 배치를 바꿔서 동그랗게 만들 수도 있지만 시간이 들고 품이 들기 때문에 애써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그에 반해 이곳은 아예 스터디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답게 중간에 긴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곳에 우리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그러니 일방적이라기보다 상방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며 자연스럽게 의사를 주고받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두 가지 차이점으로 인해 스터디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달리 화기애애해졌고 작년 11월 14일 마지막 스터디를 한 후 무려 6개월 만에 재개되는 스터디인 만큼 배움의 파토스pathos가 일렁거렸다.
▲ 옹기종기 앉아 스터디를 한다. 사진만으로도 전해지는 열띤 분위기.
노인행을 해석하며 두 가지 부분이 걸리다
성간이 지은 「노인행老人行」이란 시는 그렇게 길지 않다. 복잡한 내용이 있다거나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도 않으니 쉽게 이해될 거란 기대도 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해석을 해보면 분명히 어렵지 않은 내용임에도 두 군데서 머뭇거리게 된다. 그건 마치 『장자』 「양생주」의 ‘포정해우庖丁解牛’에서 나오는 ‘비록 그렇다 해도 매번 힘줄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르면 저는 하기 어려운 것을 보고서 두려운 듯 긴장하며 눈으로 세심히 보고 칼의 움직임은 섬세하게 합니다(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라는 말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분명히 늘 소의 발골작업을 했을 테니 칼을 드는 순간부터 전광석화로 뼈와 살을 분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일지라도 뼈와 힘줄이 엉킨 곳에 이르면 그전의 경쾌하던 손놀림과는 달리 바짝 긴장하며 칼의 움직임에 집중한 채 천천히 칼질을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아무리 쉬워 보이는 글조차도 턱하니 막히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생각할 거리이자, 고민의 지점이기도 하다. 이 시를 보면서 턱 하니 막혔던 지점은 바로 ‘남혼녀가지기시男婚女嫁知幾時’라는 부분과 ‘독좌망연심단절獨坐茫然心斷絶’이란 부분이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어디까지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르뽀’라는 말은 ‘르포르타주Reportage’라는 프랑스어에서 왔다. 이 말은 현장에 가서 사건과 인물을 취재하고 담아내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며 ‘객관이라는 말 자체가 거짓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며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었지만, 그럼에도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그 행위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기존에 있던 서정시와는 달리 서사시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현장에서 만난 뭇 민초들의 목소리를 시의 형식을 빌려 담아내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민초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긴 경우엔 어디까지 그들의 목소리로 볼 것이며, 어디까지를 서술자의 평가로 볼 것인지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이 시를 보면 일흔 살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난다. 바로 ‘자도自道’, 즉 ‘스스로 말했다’는 구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야기가 끝나는 부분은 어디인가?’라는 것이다. 처음에 해석할 때만 해도 끝부분까지를 모두 노인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두 다 노인의 푸념정도로 생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작가가 초반에 등장해 상황을 묘사했는데 마지막에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지 않은 채 끝내는 건 좀 이상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생각으로 원문을 다시 보니 마지막의 ‘獨坐茫然心斷絶’이라는 말은 성간의 시평 정도로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두 번째 생각으로 생각을 정했고 아이들의 의견도 궁금했기 때문에 문제는 ‘위 시에서 노인이 말하는 부분의 시작 句와 끝 句를 찾아 번역하시오’라고 냈던 것이다.
노인의 진술이 시작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 | |
초반 |
종반 |
余生年七十 ~ 獨坐茫然心斷絶 |
余生年七十 ~ 牛蹄脫知奈何 |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스터디에 왔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임형택 선생은 전혀 다르게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중간 중간 노인의 진술을 인용하며 그에 따라 작가의 인상을 담아낸 것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를 테면 ‘여생년칠십余生年七十’은 노인의 말이지만, ‘수각동준면심흑手脚凍皴面深黑’은 작가의 평가이고, ‘남혼녀가지기시男婚女嫁知幾時’는 노인의 말이지만, ‘단의람초재과슬短衣襤幓纔過膝’은 작가의 평가라는 것이다. 내가 고민한 것과는 완전하게 다른 해석인 셈이다. 이에 대해 아이들의 의견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김형술 교수는 “이렇게 짧은 시일 경우에 노인의 진술을 중간중간 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시에서 시평이 있다고 생각할 경우 차라리 노인의 말이 끝나는 부분을 ‘우전도학우체탈石田䂽确牛蹄脫’이라고 보는 게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봐야 ‘쇠발굽이 돌밭에 빠졌죠’라고 노인이 말을 마치자 작가가 ‘쇠발굽이 빠졌는데 어이할 거나. 노인은 홀로 앉아 망연자실하게 마음이 끊어진 듯 보였네.’라고 평가를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의 시와 같은 경우는 논평이 따로 있다고 보기엔 힘들 거 같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을 논평으로 보기엔 논평의 성격이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경우엔 마지막까지 노인의 말로 보는 게 더 나을 듯합니다.”
노인의 진술이 끝나는 부분 | |||
건빵 |
보완 |
임형택 |
스터디 결론 |
牛蹄脫知奈何 |
石田䂽确牛蹄脫 |
중간중간 작가의 개입 |
獨坐茫然心斷絶 |
▲ 민초들의 생생한 삶을 담아내려는 손길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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