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과 출입신고소
고성 대진에서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바닷가를 따라가는 길을 택했다. 동해안에 철조망이 많이 철거되었다곤 하지만 아직도 곳곳엔 철조망이 남아 있다. 철조망 건너편엔 우리의 영해인 동해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바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곳에 자유롭게 갈 수 없다.
동해에 설치된 철조망에 숨겨진 이야기
그렇다면 철조망은 무엇 때문에 설치되어 있는지도 알 만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래 맞다. 그래서 그 방어선에 따라 경계병들이 배치되었던 것이고 우린 그것 때문에 한때 두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철조망은 우리를 가두고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다를 보고도 해수욕을 하거나, 해변 산책을 해볼 수도 없다. 그저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뿐 저 너머의 다른 세상은 꿈도 꿀 수 없도록 철조망이 한계 짓고 있다. 여기에는 ‘대중통제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 ‘적으로부터 널 지켜줄 테니 넌 여기 안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라는 메시지가 철조망에 새겨 있었던 것이다.
이 철조망이 다 제거되고 우리의 의식이 자유로이 남과 북을 넘나들 수 있을 때는 언제쯤이나 올까? 고성이란 곳만 해도 남과 북으로 갈라진 비극을 안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의 반은 북한에, 반은 남한에 있다. 난 이 지역 사람들이 통일운동의 기수가 되길 희망해 봤다. 남북의 통일 이전에 고성의 통일이 먼저 이루어지길 맘속 깊이 바랐다.
도보로 통일 전망대까지 갈 수 없다
한 시간 가까이 걸으니 통일 전망대 출입신고소가 나오더라. 솔직히 긴장이 됐다. 한비야씨의 책엔 이곳부터 도보로 갈 수 없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도 그렇다고 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돌아가야 하나? 어떠한 방법이든 찾아야 하나?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생각한 것은 군인들에게 잘 이야기해서 어떻게든 도보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난 출입신고소가 그냥 초소 하나 덩그러니 있고 거기서 간단히 신원 조회만 한 다음에 들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한비야씨의 책이 나온 지 1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국토종단 여행객이 많이 다녔을 요즘엔 허용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더욱이 정상 회담도 두 번이나 했으니까 뭔가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대를 품고서 출입신고소를 향해 걸었다.
출입신고소는 내가 생각했던 초소가 아니었다.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에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즉, 군인을 설득할 수조차 없게 된 거다. 9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신고소 주변엔 국토종단을 하시는 분들도 몇 분 계셨다. ‘그건 곧 도보로도 갈 수 있다는 게 아닐까~’하는 기대를 품게 하더라. 하지만 곧 직원들이 왔고 신고 절차를 밟으려던 찰나, 직원이 단호하게 “도보로는 갈 수 없구요. 꼭 차를 타고 가셔야 하니 카풀 할 분을 데려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그마한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에 씁쓸하더라. 남북 관계가 좋았던 시절에도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남북 관계가 경색된 지금은 이런 소망 자체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거’겠지.
동행자를 얻어 전망대에 갈 수 있게 되다
난 그때부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고소를 나와 주차장으로 가서 사람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적은 일행이 오면 그분들께 말해볼 생각이었다.
그때 40대 정도 되시는 부부가 걸어오시더라. 난 대뜸 “안녕하세요. 통일전망대 가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그분들은 그렇다고 대답했고 난 사정을 이야기하며 신세 좀 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거부당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도 괜찮다고 하시더라. 들어가서 신고서를 작성하는데 나와 같은 처지의 할아버지도 그분들께 부탁을 하셔서 나와 그분이 같이 차에 타게 되었다.
이로써 통일전망대로 가는 일행은 4명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해운대에서 올라오는 길이란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다시 목포까지 갈 생각이시란다. 백두대간 종단도 하셨다는 걸로 봐서는 대단하신 분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다녀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을 많더라. 내가 길을 떠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대단하다’는 거였다. 그런데 나야말로 이분들에게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난 걸음마 수준의 여행을 한데 반해 이분들은 뛰고 날아다니는 수준의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이제 시작일 뿐이지 않은가~ 첫 걸음을 이렇게 떼었으니 더 큰 꿈을 꾸며 직접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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