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바닥에 이불을 세 개 깔고 이불을 두 개 덮고 잤더니 엄청 포근하더라. 오랜만에 집에서 자는 듯한 안락함을 느끼며 푹 잤다. 교회에선 금요심야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찬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지금 내 몸이 천근만근이니 그 시끄러움마저도 자장가처럼 들리더라. 그때 바다로 뛰어드는 꿈을 꿨었던 듯한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일어나 보니 다행히도 비는 그쳤더라. 새벽 내내 비가 왔었는데 아침에 그친 것이다. 난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징한 놈의 이 세상! 한 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여기서 통일 전망대까진 12Km다.
여행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목적지에 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만만찮은 거리였다. 처음부터 7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한다고 생각했다면 시작도 못했을 거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생각 없이 그날, 그날 걸을 수 있는 양에 만족했다. 그래서 한 걸음씩 내딛은 게 10Km가 되고, 100Km가 되고, 500Km가 되었고, ‘어느새’ 이곳에 나를 데려다줬을 뿐이다. 내 자신도 믿기지 않는 꿈만 같은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도 황당한 일을 갑작스레 겪을 때나, 분명히 자신이 이루어낸 일인데도 믿기지 않을 때가 그렇다. 지금 나의 의식은 연속선상에 있는 게 아니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중간 과정은 깡그리 지워지고 목포에서 출발할 당시의 기억과 지금의 기억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포를 지나 바로 고성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바로 그런 혼란 자체가 여행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반증하는 지도 모른다. 여행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은데 이젠 그만두어야 하니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든다. 난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 왠지 ‘징한 놈의 이 세상! 한 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이라던 『왕의 남자』의 대사가 떠오른다.
인생엔 종결이 아닌 분기점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기운이 넘친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 맞다~ 오늘 걷는 것으로 ‘09년 국토종단’은 끝나지만 이걸 계기로 난 나만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결국 인생에는 끝과 시작이라는 단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분기점만이 있을 뿐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분기점을 늘 통과해야 하는 여정인 셈이다. 분기점을 지날 때 내가 어떻게 변하고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이며 지금 이 순간들이 쌓여 미래의 내가 될 것이다. 밤하늘엔 별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같이 공존한다. 그와 같이 지금의 내 모습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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