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화처럼 보이는 독백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서양에서는 진리(truth)라고 한다면, 동양에서는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사실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근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 자체로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 자체로는 공허한 질문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마치 진리나 도가 자명하게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나 도라는 용어 자체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도인들, 즉 “혹시 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라고 자득한 미소로 다가오는 그들과 구별되지 않게 될 것이다. 진리나 도는 모두 사유와 존재 혹은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사태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양자 사이의 일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이하게 이해되는 진리나 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유(= 주체)와 존재(= 타자)의 일치로서의 도나 진리는 이 양자 중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리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화는 말 그대로 둘(dia)이 상징하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logos)다. 반면 독백은 말 그대로 홀로(mono) 수행하는 이야기(logos)다. 우리가 가끔 홀로 독백을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의심하고 반성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대화가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독백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아무리 앞에 타자가 있어도 그 타자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혹은 이해하려는 의지 자체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이야기는 겉으로는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대화나 독백을 의미하는 ‘dialogue’와 ‘monologue’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로고스(logos)라는 말은 많은 철학적 함축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함축은 아마도 이성ㆍ법칙ㆍ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모놀로그와 다이얼로그는 상이한 진리관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모놀로그가 홀로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라면, 다이얼로그는 타자와 함께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사유나 주체 중심적으로 진리나 도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또 동시에 존재나 타자 중심적으로 진리나 도를 이해할 수 있다. 전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자신과 타자와 관계한다는 점에서 독단적이고 유아론적인 논의, 즉 독백(monologue)에 입각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면, 후자는 참이라는 생각을 부단히 구체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재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에서 대화(dialogue)에 입각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화의 논리와 독백의 논리, 혹은 존재(=타자) 중심적인 진리와 사유(=주체) 중심적인 진리에 대한 구분은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구분이 상이한 주체 형식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상학(phenomenology)에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상호관계’나 ‘상호차이’를 의미하는 ‘inter’라는 말과 주관성 혹은 주체성을 의미하는 ‘subjectivity’라는 말이 합성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호 주관성을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해방식은 상호를 강조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주체는 타자와의 상호 관계나 차이를 통해 발생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이해방식은 주체성을 강조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선험적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나 차이를 정립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로 이해된 주체 형식이 대화의 논리와 존재(=타자) 중심적인 진리관과 부합되는 형식이라면, 후자로 이해된 주체형식은 독백의 논리와 사유(=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에 부합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제물론(齊物論)」편에서 장자가 “길은 걸어간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道行之而成]”라고 말한 언설의 중요성이 있다.
다시 말해 도는 미리 존재하는 어떤 진리가 아니라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함으로써 드러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철학의 목적은, 도가 주체 및 타자와 무관하게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의 부조리함을 폭로하고, 동시에 도는 주체와 타자가 소통하는 데서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옹호하려는 데,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꿈으로부터 깨어나서 타자와 더불어 소통하는 삶을 영위하라는 전언을 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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