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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Ⅹ. 날개 없이 나는 방법 - 1. 수양의 세계와 삶의 세계, 수양론은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Ⅹ. 날개 없이 나는 방법 - 1. 수양의 세계와 삶의 세계, 수양론은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

건방진방랑자 2021. 7. 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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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양론은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

 

 

수양론은 기본적으로 내향적이면서 따라서 자기지시적일 수밖에 없는 실천론이다. 왜냐하면 수양의 주체와 그 대상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양론은 이런 자기지시(self-reference)역설을 완화하기 위해서 제3의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수양의 이념이자 목적으로 도입되는 본래적 마음 혹은 내재적 초월성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양론이 이제 모든 난점과 역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양의 이념으로서 내재적 초월성을 도입한 수양론은 동일한 마음을 세 종류의 마음으로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첫째는 수양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주체적 마음)이고, 둘째는 수양이 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마음(=현상적 마음)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수양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혹은 회복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마음(=본래적 마음), 즉 이념으로서의 마음이다. 이처럼 수양론은 세 가지로 분화된 마음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초월성=내재성이라는 도식, 즉 초월적 내재나 내재적 초월이라는 규정만큼 중국 철학의 내적 구조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초월성=내재성을 강조하는 이런 전통에서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이분화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초월성은 내재성과 결합하기 위해서 마음의 내재적 본질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이제 실현되어야 할 본질로서의 마음과 현상적인 마음으로 이분화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렇게 이분화된 틈 속에서 주체적 마음이 자리잡는다. 주체적 마음은 이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본질로서의 마음이 내는 소리(=명령)를 의식해야만 한다. 이런 깊이의 느낌 속에서 중국 철학의 복잡한 인성론(人性論)형이상학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란 기본적으로 높이나 깊이라는 원근법 속에서 높이 있는 것과 깊이 있는 것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선택하는 데서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월성=내재성의 도식 하에서 마음은 본래성과 비본래성으로 분열되고, 주체는 이 사이에 머물며 진동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내재적 본질로 이해된 초월성도 마음이라는 존재론적 장소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런 초월성은 결국 유아론적인 초월일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초월성=내재성이라는 도식은 왜 중국 철학 전통에서 수양론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수양론은 주체가 자신이 비본래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본래적인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이분화, 즉 본래적 마음과 비본래적 마음이란 이분적 구조는 도가(道家)ㆍ유가(儒家)불교(佛敎)를 막론하고 중국 철학의 모든 내적 구조를 형성한다. 단지 차이는 본래적 마음=내재적 초월성)을 도가에서는 덕()으로, 신유학(新儒學)에서는 본성()으로,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으로 변주해서 말하고 있다는 데 있을 뿐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중국 철학에서는 수양론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삼원적 구조(즉 뜻을 세우는 주체적 마음, 수양되어야 할 현상적 마음, 이상적인 본래적 마음)에서 뜻을 세우는 주체적 마음에 대한 논의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중국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주체의 마음을 대상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중국 철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없었다. 왜 이러저러한 마음을 본래적 마음으로 긍정해야만 하는가? 왜 자신의 현상적 마음을 주체는 부정적으로 판단하는가? 현상적 마음과 주체의 마음의 분리는 왜 발생하는가? 바로 이 점에서 중국 철학의 수양론 일반은 독단적인 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저러한 마음을 본래적 마음으로 결단하고 나아가 이런 결단에 따라서 현상적 마음을 평가하고 조절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체의 마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결단과 노력을 기울이는 주체적 마음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수양할 수 있는 가능 근거를 선천적으로 부여받았다고 설명될 뿐이며,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인 본래적 마음도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자명한 인간의 목표이며 우리는 그런 마음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입지하게(뜻을 세우게) 되어 있는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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