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교탁에 올라서라
시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지를 알려줬다. 그러다 갑자기 키팅은 교탁에 올라간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교탁을 밟고 올라설 것을 주문한다. 역시나 꽤나 황당한 장면이다. 과연 현재 한국에서 학생들이 교탁에 올라간다면, 교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교사가 올라가라고 해서 올라갔다 해도 그걸 본 다른 교사들은 그 교사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욱이 지금처럼 교탁이 최신 기자재로 바뀐 상황에선 더더욱 이와 같은 광경은 힘들 것이다.
▲ 교탁에 올라선 키팅. 학생들도 '저 선생이 왜 저러나?' 의아했을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자기 자신 안에 억압된 영감으로 세상을 대하라
키팅이 그와 같이 도발적(?)인 행동을 하도록 한 데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원뿔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걸 정면에서만 본 사람은 당연히 삼각형이라 우길 테고, 밑면에서만 본 사람은 원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며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만, 실상 두 사람 사이에선 해답이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을 일러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고 한다. 이럴 땐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고 그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전체를 본 사람만이 ‘원이지만 삼각형일 수 있다’고 판단해줄 수 있다. 어찌 보면 사물의 한 면만을 보고 그걸 주장할 때 착각과 오류에 빠지게 된다.
▲ 원뿔은 원인가? 삼각형인가? 이걸 따지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관점이 달라지면 다른 걸 볼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은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늘 보아오던 시점이 아닌 다른 시점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우치다 쌤은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하는 것’이라 말했는데 키팅은 아예 그걸 교탁에 오르는 행위로 보여준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부름을 받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이 ‘물듦’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잣대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힐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자격증도 딸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출판사, 2011년, pp 59
시좌가 확보되면 지금까진 보지 못했거나, 보았어도 ‘설마’하며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지금껏 당연시하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전혀 다르다고 느끼던 것이 실은 똑같은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 시야가 달라지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전주에 있을 땐 모악산에 자주 올랐다. 힘들게 올라가지만 조금씩 시야가 넓혀지며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게 된다는 느낌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모악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전주의 풍경은 과히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산에 올라 원시안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대지를 보고 있노라면 ‘참 별 것 아닌 것들을 별 것으로 여기며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가 달라지면 삶이 달리 보이고, 현실이 더 이상 비극적으로만 보이지 않게 된다. 바로 그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넓게 세상을 보고 삶을 관조하기 위해서 무작정 산에 올랐던 것이다.
이처럼 키팅의 권유대로 교탁에 올라본 학생들은 잠시나마 달라진 시야를 통해 공간에 갇혀, 성공 신화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힘겨운 삶인지 알았을 것이다.
▲ 올라야 하는 이유는 남의 시선으로만 보지 말고, 자신의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를 욕망할수록, 갈등은 커져 간다
키팅은 수업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금기에 맞서고, 틀을 깨부수며, 나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키팅의 수업 시간이 기다려 질 수밖에 없고, 다른 교사들은 그런 키팅의 독단적인 수업이 눈엣 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학생들이 점차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그걸 점차 추구하게 되면서 ‘학생과 학부모 사이’, ‘학생-학교의 규율 사이’, ‘키팅-학부모&교장 사이’엔 갈등이 커져만 간다.
다음 후기에선 키팅의 남다른 수업 시간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고, 학생들이 그런 수업을 통해 점차 어떻게 변해갔고 어떻게 ‘카르페디엠의 삶’을 살게 됐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 학생들은 키팅처럼 일탈을 즐기며,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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