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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 춘일재거 만용도사목흔향영천연시류 분운위시(春日齋居 漫用陶辭木欣向榮泉涓始流 分韻爲詩)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김창협 - 춘일재거 만용도사목흔향영천연시류 분운위시(春日齋居 漫用陶辭木欣向榮泉涓始流 分韻爲詩)

건방진방랑자 2021. 4.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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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일재거 만용도사목흔향영천연시류 분운위시(春日齋居 漫用陶辭木欣向榮泉涓始流 分韻爲詩)

 

仲春天氣佳 惠風扇淸穆

 

陽和浹冥凌 氷雪罷百谷

 

川流渙渙來 搖蕩動人目

 

潛魚戲暖藻 柔荑發佳木

 

周覽感時物 運化一何速

 

 

終朝坐茅屋 四體無所勤

 

藜藿不盈槃 對之常欣欣

 

問我亦何樂 游思在典墳

 

古道不可追 引領望華勛

 

慷慨撫我琴 浩歌誰當聞

 

 

山居何牢落 四望頗淸曠

 

喬松夾廣川 白雲冒增嶂

 

眺瞻旣多娛 春物復訢暢

 

野鹿行命羣 時禽語相向

 

誰爲同心者 懷哉不可忘

 

 

少小無遠志 頗懷軒冕榮

 

朅來時不偶 巖處偃柴荊

 

夜聽熊羆嗥 晝看麋鹿行

 

鳥獸非我羣 誰與託幽情

 

幸有兄弟樂 可以卒平生

 

 

磊磊釣臺石 濺濺釣瀨泉

 

上有古楓樹 託根幾何年

 

株幹半摧折 尙爲人所憐

 

攀援石上坐 俯仰念昔賢

 

異代感同調 臨流一喟然

 

 

春山有佳色 霞氣上蔚芊

 

振衣時獨往 荒谷無術阡

 

巖泉恣流憩 濯手弄涓涓

 

磊砢千丈松 披拂好風前

 

泠然所心善 日晩不知旋

 

 

田家聞布穀 耒耜日就治

 

相呼種春麥 東作自玆始

 

而余長京洛 生不識田事

 

明農古有言 素食詩人恥

 

今我不努力 歲暮將何俟

 

 

屋下淸川水 深處可方舟

 

磷磷涵白礫 素鱗中沈浮

 

徐行拂春服 坐石俯長流

 

從容濠上觀 徜徉沂雩游

 

古人雖已遠 此樂今可求

農巖集卷之一

 

이 시는 봄날 집에 있으면서 쓸데없이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木欣向榮 泉涓始流구절을 사용하여 지은 시로, 귀양 온 부친을 따라 기세(棄世)의 뜻을 옳고 있다.

 

김창협은 당대 벌열(閥閱) 출신이기는 하지만, 20대 중반에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를 두고 벌어진 예송(禮訟)에서 스승 송시열(宋時烈)의 관작이 박탈되고 부친 김수항(金壽恒)도 전라도로 유배 가는 시련을 겪으면서 그의 사유(思惟)에는 사환(仕宦)에 대한 염증과 은일(隱逸)에 대한 지향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30대에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다시 득세한 부친이 영의정이 되자, 10년간 그의 환로는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9세에 닥친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소용돌이는 그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실날 같은 기대마저 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친의 사사(賜死)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김창협은 그해 영평(永平) 응암(鷹巖)으로 들어가 농암서실(農巖書室)을 짓고 자호 그대로 야인(野人)의 삶을 선택한다. 이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노론(老論)의 세상이 된 뒤에도 그는 환로(宦路)와 절연(絶緣)하고 학문과 시작(詩作)과 유람(遊覽)으로 시종(始終)하는 자유로운 생애를 보냈던 것이다. 생애 후반부에 한거(閑居)와 은일(隱逸)에 관련된 시편들이 많은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이다(김성언, 농암 김창협의 삶과 시).

 

이덕무는 청비록에 다음과 같은 말을 실어 놓았다.

농암 김창협(金昌協)의 시에, ‘진황의 만리장성 보지 않고는, 남아의 의기 높아지지 못하리. 한호 굽이에 작은 어선 띄워 놓고, 도롱이 입고서 홀로 살아가리하였고, 삼연(金昌翕의 호, 김창협의 동생으로 시문에 뛰어났다) 선생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 왕래 빈번한 만국의 중심부라, 낙타며 코끼리 산악처럼 서 있네. 인생은 시야를 좁혀서는 안 되니, 그를 넓혀야 흉금이 넓어지리. 우리나라는 압록부터 동쪽이 비좁으니, 사해의 영준들과 추축하기 원일세두 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우리나라의 표준이 될 뿐 아니라 형제 두 분이 다 이름난 문장으로 밖에서 구할 것이 없었는데도 중국을 끊임없이 사모하였으니, 예로부터 많은 책을 읽고 뜻이 넓어진 분들은 반드시 이런 생각을 갖는 모양이다. 그 아우 稼齋(金昌業의 호, 둘째형 창협, 셋째형 창흡과 함께 도학ㆍ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38년에 큰형 昌集謝恩使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그곳의 山川關防寺觀書籍器物 등을 기록하여 돌아왔다. 또 그림에도 뛰어나서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다)선생은 그 백씨몽와(伯氏夢窩, 金昌集의 호, 숙종 38년에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領議政이 되었다)선생을 따라 중국에 가서 험고(險固)한 산과 융성(隆盛)한 인물과 성지(城池)ㆍ누대(樓臺)ㆍ풍속(風俗)ㆍ의문(儀文) 등을 두루 보고서 그것을 기록하여 돌아와서는 형제의 시를 모아 김씨연방집(金氏聯芳集)을 만들고 절강(浙江)의 선비 양징영수(楊澄寧水)에게 서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김씨의 문헌이 중국에까지 빛나게 되었다. 영수는 농암 선생의 시를 칭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관후묘(關侯廟)시를 더욱 칭찬하였다. 관후교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우거진 사당문 가엔, 쓸쓸한 바람만 일어날 뿐. 단청에 귀신이 접한 듯한데, 보는 이의 눈물은 고금이 같네. 北地(蜀漢 後主의 아들 北地王 ()을 말한다. 촉한이 魏將 등애(鄧艾)에 의해 항복하게 되자, 그는 한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옳다면서 항복을 반대하고 昭烈廟에 들어가 통곡하다가 자살하였다)는 항복을 부끄러워하고, 남양(南陽, 촉한의 丞相 諸葛亮을 말한다. 그는 자신이 後主에게 올린 出師表 그대로, 있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여섯 차례나 中原을 수복시키려 했으나 끝내 五丈原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은 국궁을 본받았네. ! 충정이 하나같았으니, 두 분을 사당에 함께 모셨네. 일찍이 청음(淸陰, 金尙憲의 호이다. 그는 仁祖 때 좌의정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반대하다가 화의가 성립된 뒤에 瀋陽으로 잡혀가서 3년간의 억류생활을 하였다)선생이 수로(水路)로 중국 서울을 갈 적에 제남(濟南)에서 어사(御史) 장연등(張延登)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70년 뒤인 계사년에 증손(曾孫) 가재(稼齋)가 다시 중국에 가서 양징(楊澄)을 만나 교류하였고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 자는 晉卿, 호는 厚菴. 나라 초기의 유명한 성리학자로 文淵閣太學士를 지냈으며, 周易通編洪範說등의 저서를 남겼다)를 보았으며, 28년 뒤에는 청음 선생의 현손(玄孫) 잠재(潛齋) 익겸(益謙) 일진(日進)이 중국에 들어가서 치청산인 이개철군(李鍇鐵君,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盤山에 은거하여 豸靑峯 밑에서 농사를 지었다. 저서로는 含中集이 있다)과 만나, 연대(燕臺) 밑에서 서로 노래 부르며 강개해하였고, 그 뒤 26년에는 청음 선생의 5대 족손 양허당재행(養虛堂在行) 평중(平仲)이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절강의 명사 육비(陸飛) 기잠(起潛)ㆍ엄성(嚴誠) 역암(力闇)ㆍ반정균(潘庭筠) 향조(香祖) 등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힘 있는 문장을 지으며 질탕(跌宕)하게 논 것은 천하의 성사(盛事)였다. 청음 선생 이후로 140~150년 동안 김 씨의 문헌이 우리나라의 으뜸이 된 것은 대대로 중국을 좋아하고 견문을 넓힌 데서 연유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유풍 여운이 오늘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다[農巖先生詩 未見秦皇萬里城 男兒意氣負崢嶸 漢湖一曲漁舟小 獨速簑衣付此生 三淵先生詩 肩摩轊擊輳萬國 嵬駝巨象峙山岳 人生不可小所見 大目方令胸肚擴 鴨江以東講道窄 四海英俊願追逐 兩先生道學文章 表準東國 家庭之內 塤倡箎和 不假外求 而俱慕中國 津津不已 終古讀書萬卷 胷襟恢蕩者 必具此想 其弟稼齋先生 則隨其伯兄夢齋先生入燕 壯觀山河之固 人物之盛 城池樓臺風俗儀文 著錄而歸 選輯昆季之詩 爲金氏聯芳集 屬浙士揚澄寧水 評序而來 於是金氏文獻 照爛中國 寧水推奬農巖之詩 尤賞其關侯廟詩 廟貌森牖戶 窺臨颯有風 丹靑鬼神接 涕淚古今同 北地羞啣璧 南陽效鞠躬 忠貞恨一槩 合此幷幽宮 盖淸陰先生 水路朝京 於濟南 逢張御史延登 後七十餘年癸巳 曾孫稼齋入燕 逢揚澄證交 望見李榕村光地 後二十有八年 淸陰先生玄孫潛齋益謙日進入燕 逢豸靑山人李鍇鐵君 相與嘯咜慷慨於燕㙜之側 後二十有六年 淸陰先生五代族孫養虗堂在行平仲 逢浙杭名士陸飛起潛嚴誠力闇潘庭筠香祖 握手投契 淋漓跌宕 爲天下盛事 自淸陰以來 百有四五十年 金氏文獻 甲於東方者 未必不由於世好中原 開拓聞見 遺風餘音 至今未泯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24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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