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에 사는 백성들
산민(山民)
김창협(金昌協)
下馬問人居 婦女出門看
하마문인거 부녀출문간
坐客茅屋下 爲客具飯餐
좌객모옥하 위객구반찬
丈夫亦何在 扶犁朝上山
장부역하재 부리조상산
山田苦難耕 日晩猶未還
산전고난경 일만유미환
四顧絶無隣 雞犬依層巒
사고절무린 계견의층만
中林多猛虎 采藿不盈盤
중림다맹호 채곽불영반
哀此獨何好 崎嶇山谷間
애차독하호 기구산곡간
樂哉彼平土 欲往畏縣官
락재피평토 욕왕외현관 『農巖集』 卷之一
해석
下馬問人居 婦女出門看 | 말에서 내려 “누구 없느냐?”라고 물으니 부인이 문에서 나와 보네. |
坐客茅屋下 爲客具飯餐 | 초가집 아래에 손님을 앉게 하고 손님 위해 밥과 반찬 갖춰주네. |
丈夫亦何在 扶犁朝上山 | “남편은 또 어디에 있소?” “쟁기 메고 아침에 산에 올라 |
山田苦難耕 日晩猶未還 | 산 밭은 괴로워 밭갈기 힘드니 해가 저물어도 오히려 안 돌아왔죠.” |
四顧絶無隣 雞犬依層巒 | 사방 돌아보니 끊어진 듯 이웃 없고 닭과 개만이 층층의 산봉우리 의지하네. |
中林多猛虎 采藿不盈盤 | 산 중간에 사나운 범 많고 콩잎 따도 소반 채우지 못하네. |
哀此獨何好 崎嶇山谷間 | 애달프네. 유독 무에 좋아 험난한 산골 사이에 있는가? |
樂哉彼平土 欲往畏縣官 | 즐겁도다! 저 평평한 토지여! 가고프지만 현의 관리 두려워서겠지. 『農巖集』 卷之一 |
해설
이 시는 1678년, 그의 나이 27세 때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도중 산촌을 보고 읊은 애민시(愛民詩)이다.
김창협은 ‘平生慕杜老(「舟遷」)’처럼 두보(杜甫)를 작시(作詩)의 모법으로 삼았는데, 위의 시는 두보의 「삼리(三吏)」, 「삼별(三別)」을 연상케 한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4년(1708) 고 김창협의 졸기(卒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지돈녕부사 김창협이 졸(卒)하였다. 김창협의 자(字)는 중화(仲和)로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온수(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문장을 지으면 농욱(醲郁, 맛이 진함)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송(宋)나라 문호(文豪) 구양수(歐陽修)의 호(號).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문장이 농욱(醲郁)하다고 함】의 정수(精髓)를 깊이 얻었다. 국조(國朝) 이래로 작자는 1, 2분에 불과했는데, 김창협이 정립(鼎立, 솥발과 같이 셋이 나누어 섬)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詩도 역시 漢ㆍ魏를 출입하면서 소릉(少陵, 唐의 詩人 杜甫의 호)으로 보익(補翼)하였다. 고고(高古)하고 아건(雅健, 筆力이 高尙하고 기운참)하여,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는데, 조금 후에 이것은 우리 선비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에만 오로지 정진하여 염락관민(濂洛關閩)【송(宋)나라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그 아우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성리학】의 학(學)에 미쳐서 학문에 젖어들고 널리 행하여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가 정확하고 공부가 독실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宋時烈)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晩年)에 의리(義理)가 꽉 막히고 사문(斯文)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니, 명의(名義)를 표정(表正)하고 사피(邪詖)함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세도(世道)가 힘입어서 유지(維持)되어 울연(蔚然)히 유림(儒林)의 으뜸이 되었다. 따라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가르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생 가운데 문사(文詞)를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에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괴과(科擧에서 文科의 甲科를 이르는 말)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법연(法筵)에 진강(進講)하니, 순부(淳夫)【송(宋)나라 유학자 범조우(范祖禹)의 자(字), 평상시에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지마는, 일을 만나면 시비(是非)를 분변하여 밝혔음】처럼 삼매(三昧)의 경지에 있다는 명성이 있었다. 더욱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에 잊지 않고 돌보고, 일을 만나면 경계하여 바로잡아 임금의 노여움을 피하지 않았다. 기사년(1689 숙종 15년)의 화를 만나자, 다시는 당세(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갑술년의 정국 변동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산(窮山)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지취(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資稟)의 순수함과 문장(文章)의 높음과 학술(學術)의 심오함을 논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큰 선비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이었다. 태학생(太學生)들이 관(館)을 비우고 와서 제수를 올렸고, 학자들이 그를 ‘농암선생(農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문집(文集) 34권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知敦寧府事金昌協卒 昌協字仲和 領議政壽恒第二子也 天資溫粹潔淸 無一點塵俗氣 爲文章典則濃郁 深得六一精髓 國朝以來 作者不過一二公 昌協可以鼎峙云 詩亦出入漢魏 翼以少陵 高古雅健 不事膚革 已而謂此不足爲吾儒究竟事業 遂專精六經 以及濂洛關閩 浸涵演迤 至忘寢食 見解精確 工夫篤實 非挽近拘儒可論也 於朱子書 用功尤深 宋時烈著朱文箚疑 多用其說 晩歲當義理晦塞 斯文磔裂之會 以表正名義 攘斥邪詖爲己任 世道賴以維持 蔚然爲儒林之宗 從學者甚衆 訓誨不少倦 後生有以文詞就正者 輒以進之於學問 少登魁科 望臨一時 進講法筵 有淳夫三昧之譽 尤眷眷於君德闕遺 遇事規切 不避觸忤 及遭己巳之禍 不復有意於當世 更化之後 屢召不起 忍飢窮山 固守而終身 雖異趣者 亦高仰之 以爲難及 蓋論其資稟之純 文章之高 學涉之深 俱詣絶於人 允爲間世之鴻儒云 至是卒 年五十八 太學生捲堂來奠 學者稱之爲農巖先生 有文集三十四卷行于世 後贈諡文簡].”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하, 이담, 2010년, 249~251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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