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
앞에서 쓴 13편의 후기를 통해 영화에 묘사된 학교가 현재의 한국 학교와 얼마나 비슷한지, 그 와중에서도 키팅 선생의 수업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수업인지 살펴봤다.
▲ 키팅의 수업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겐 하나의 좋은 소스가 된다.
교육은 대화다
하지만 아무리 한 교사의 교육철학이 탁월하고 교수방법이 좋다 할지라도, 그게 학생들에게 가 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교육은 교사만의 것도, 학생만의 것도 아닌, 쌍방의 유기적인 흐름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교육은 대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쌍방의 주고 받음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대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생각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만약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야기를 나누기 전과 나눈 후에 생각의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건 대화를 했다기보다 두 사람이 긴 시간동안 독백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2012년에 이왕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상대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위치가 조금 옮겨집니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나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죠. 그 상태에서 나 또한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러면 상대방 또한 어떤 감각적인 위치가 옮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위치가 옮겨지고 옮겨지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멈추든 먼 거리에 멈추든 멈추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통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위치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소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라는 말을 해줬는데, 이 말이야말로 대화의 속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대화에 인색한 사회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지만, 지시나 혼잣말만이 횡행할 뿐 대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드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은연중에 독백이나 지시를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착각은 혼자만의 수업을 하면서도 ‘학생들과 소통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 2012년 이왕주 교수와의 대화는 소통과 배움에 대한 상식을 깨게 했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변해간다
이처럼 수업이 대화와 같다면, 짧게는 한 학기에서 길게는 일 년의 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 교사와 학생의 감각적인 위치가 옮겨져야만 한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학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역동의 장에서 함께 했기에 교사의 감각적인 위치도 옮겨지며, 학생의 감각적인 위치도 옮겨진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위치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 함께 했기에 두 존재 사이엔 변화가 존재한다.
이런 가르침과 배움의 역동성을 이미 동양사회에선 예전부터 포착하고 있었나 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맛 좋은 음식이 있더라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엄청난 지혜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좋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운 후에야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고, 가르쳐본 후에야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아야 스스로 돌아볼 수 있고, 어렵다는 걸 알아야 스스로 보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고 말한 것이다. 『열명』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반반이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雖有佳肴, 不食不知其旨也. 雖有至道, 不學不知其善也. 是故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 說命曰, 斅學半, 其此之謂乎. -『禮記』, 「學記」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가르침과 배움을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고 ‘가르침=배움’이라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가르치는 이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서로 성장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성장이란 위에서부터 쭉 말했다시피 ‘감각적인 위치에 변화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알려주거나,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변해가고 함께 깨우쳐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건 곧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던 명장면.
지금까지의 『죽은 시인의 사회』 후기는 키팅 선생의 탁월한 교육관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학생의 감각적인 위치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아니 학생과 함께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 이번 후기부터는 키팅과 학생이 어떻게 공명했는지, 어떤 감각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모든 학생을 다루기보다, 한껏 주눅 들어 있는 토드 앤더슨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을 접어야 했던 닐 페리와 남자 친구가 있는 크리스를 짝사랑하는 녹스 오버스트리트, 세 명의 학생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 이젠 학생의 입장에서 배움이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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