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행복한 오독의 막춤
삶이 잠시만 ‘얼음 땡’ 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놀이할 때 ‘타임!’이라고 외치면 잠시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게임의 법칙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쉽게도 인생에는 그런 ‘얼음 땡’이나 ‘타임’이 없어서 탈이었다. 잠시만 삶의 속도를 ‘제로’로 만들고 싶을 때, 그럴 땐 어떤 따스한 위로도 어떤 그럴듯한 자기합리화도 먹히지 않는다. 그럴 땐 나는 주로 기약 없는 ‘겨울잠’을 청하지만, 그것조차 효과가 없을 땐 할 수 없이 책을 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랫동안 좋은 책인 건 알았지만 절대 펼쳐보지 않았던 책들을 꺼내 읽는다. 먼지 쌓인 이 책들 대부분은 ‘어렵다, 머리 아프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왔던 철학서들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처방전도 통하지 않을 땐 신기하게도 이런 극약처방이 뜻밖의 약효를 발휘한다. 그제야 좀처럼 ‘인간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명강의가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고, 오래된 LP판에서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반의 명연주처럼 마음속에서 따스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렇게 내 마음에 뒤늦게 문을 두드린 철학자들이 우리의 고단한 삶을 향해 보낸 메시지를, 내가 사랑한 영화의 언어를 빌려 ‘믹싱’한 컴필레이션 음반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영화를 통해 철학에 손쉽게 다가가기 위한 몸짓이 아니다. 어쩌면 철학 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은 철학과 전혀 인연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를 통해 철학자의 핵심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빠졌을 때, 인생에서 너무 커다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정말 필요한 ‘실용적(?)’ 에너지를 철학자의 ‘문장’에서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에서 우리가 함께 만나는 철학자는 ‘중요한 철학자’라기보다는 철저히 ‘내가 편애하는 사람들’이며, 이 글은 그들의 목소리를 음악 삼아 추는, 내 행복한 오독의 막춤이다.
그들은 내가 꿈꾸는 세상의 목소리를 번역하는 뮤즈가 되어주었고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매일 밤 ‘받아쓰기’하며 나도 모르게 황홀경에 빠졌다. 철학책을 읽는 것은 시험이나 논문이나 강의를 비롯한 각종 ‘아는 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앎’이 내 삶으로, 몸으로, 맘으로 침투하여 그 모두를 철학의 빛깔로 물들이는 새로운 경험이다. 더구나 글쓰기의 과정이 인터넷 일일 연재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글쓰기는 어느 때보다 덜 외롭고, 덜 지치고, 덜 힘들었다. 누군가 실시간으로 내 작업의 과정을 엿보고 있다는 것이 이토록 큰 응원의 마사지가 될 줄은 몰랐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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