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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 10. 훈육의 프로그램도 미처 길들이지 못한 마음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 10. 훈육의 프로그램도 미처 길들이지 못한 마음

건방진방랑자 2021. 7. 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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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훈육의 프로그램도 미처 길들이지 못한 마음

 

 

그러니까 그렇게 멀고도 높은 곳에서 다른 이들의 담론을 기술하고자 하는 당신은 대체 어디에서 말하고 있다고 자처하십니까?

-미셸 푸코

 

 

감옥 아닌 곳에서 인간을 감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은 신이(혹은 카메라가) 언제나 너를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체의 무의식에 기입하는 것이다. 특히 카메라가 제이슨 본의 등 뒤를 비출 때, 관객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제이슨 본의 목숨을 노리는 그들의 시선은 마치 신처럼 전지전능하여 언제든 바로 그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총구를 들이댈 것만 같다. 제이슨의 기억을 상실하게 한 사건도 바로 그의 등 뒤를 쏜 두 발의 총성 때문이지 않았는가.

 

트레드스톤의 행동대장 격인 콩클린을 직접 독대함으로써 제이슨은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에 한층 가까이 가게 된다. 제이슨은 콩클린과의 섬뜩한 조우로 인해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제이슨 스스로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나는 트레드스톤 요원이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내가 누구이든, 내가 누구였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임을.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부터 다시 만들어갈 수 있다.

 

내가 누구였든 지금부터의 결정 하나하나에 따라 나의 미래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누구였는가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고, 그 진실의 참혹함이 나를 평생 추격할 것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는 콩클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진실의 파편에 맞아 휘청거린다. 그제야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누구였는가라는 필생의 화두는 나의 과거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바뀐 것이다.

 

케인이란 존재를 만든 건 너야! 움보시와의 미팅을 주선한 것도 경비 회사를 찾은 것도 너야! 사무실에 침입한 것도 너지! 젠장맞을, 암살 장소를 그의 요트로 정한 것도 바로 너잖아!” 이제야 생각난다. 모두 나였다. 모두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행하고 내가 실패한 것이었다. 누군가 나의 정체성을 일부러 지우려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를 세상 속에서 삭제한 것도 나 자신이었다. 더욱 훌륭한 암살 기계가 되기 위해, 그 모든 자아의 삭제프로그램 또한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트레드스톤의 임무는 살인의 주체를 철저히 영원한 비밀에 부친 채 취도 새도 모르게 암살대상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제이슨 본은 이 비밀 임무 수행에 가장 적합한 최고의 인간병기였던 것이다.

 

 

 

 

트레드스톤의 시스템은 마치 한 명의 암살대상을 죽이기 위해 수십 명의 저격수에게 총을 쏘게 하는, 그리하여 누가 쏘았나라는 질문에서 모두를 회피시키는 주체의 삭제전략과 비슷하다. 저격수는 설마 내 총에 맞아 죽은 것은 아니겠지라는 위안 속에 죄책감을 씻어버리는 것이다. 모두 조직의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단지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이름만으로 죄도 죄책감도 책임도 조직에 돌아간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벌거벗은 자아와 만나고 나서야 제이슨은 깨닫는다. 살인의 죄책감은 온전히 자신의 개별적인육체로 쏟아지는 고문임을. 과거의 그가 트레드스톤을 스스로 택한 것이라 해도 지금의 그는 그 고통스러운 살인의 게임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제이슨은 콩클린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이런 일은 이제 그만 두고 싶어.” 제이슨은 이제야 기억났다. 왜 움보시를 쏘지 못했는지를. 5일씩이나 움보시가 타고 있던 배에 잠복하고도 움보시를 차마 쏠 수 없었던 이유. 그를 쏘려고 했던 순간 그의 가슴 속에서 꼬물거리던 아이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가득 차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제이슨을 바라보던 그 아이들의 눈빛. 제이슨은 아이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차마 아빠를 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 뼛속 깊이 속속들이 조직의 기계부품이 되지 못한 제이슨이라는 한 인간의 아킬레스건. 악명 높은 트레드스톤의 훈육 프로그램도 미처 길들이지 못한 제이슨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렇듯 너무도 나약해서 더욱 아름다운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말한 모든 것들의 무게 아래에서 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이, 당신들이 말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신보다 더 오래 살 한 인간은 만들어 내리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미셸 푸코,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1994, 29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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