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모두 너였어! 널 만든 건 너야!
우리는 진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결국 잃어버린 나를 깡그리 지우는 것이었다.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기억의 창고를 열기 위한 열쇠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유일한 길임을. 과거의 나를 모조리 삭제할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나를 만든 자들’의 게임 프로그램 속에서 그들의 통제를 받는 인간병기로 머물게 될 것이다. 콩클린의 말처럼, 제이슨은 미국 정부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통제 불능의 삼천만 달러짜리 무기, 빌어먹을 실패작이었으므로.
제이슨은 이제 ‘이런 일’은 그만 하고 싶다고, 더 이상 살인의 게임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다. 콩클린은 코웃음을 친다. “그건 네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야!” 천하무적의 인간 살인병기, 제이슨 본을 탄생시킨 것은 미국의 국방부 산하 트레드스톤 프로젝트였지만 제이슨 본이라는 ‘대 실패작’으로 인해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들이 창조한 인간병기 제이슨 본으로 인해 거꾸로 그들의 조직이 역습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이슨 본이 원하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조직의 소탕작전이 아니라 그저 ‘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일 뿐이다. 이제 그가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삭제하는 길뿐이다. 제이슨은 콩클린에게 총구를 겨누고 마지막 다짐을 받으려 한다. 모두에게 내가 죽었다고 말해줘. 아무도 날 찾지 않게. 아무도 날 기억하지 않게.
제이슨: 이제 제이슨 본은 죽었어, 내 말 알겠어? 그는 2주 전에 익사했어. 사람들에게 제이슨 본은 죽었다고 발표해, 알아듣겠지?
콩클린: 그러면 넌 어디로 갈 건데?
제이슨: 몰라. 하지만 만약 누구든 내 뒤를 미행하면, 난 하늘에 맹세코, 너에게 복수할 거야. 난 이제 내 편일 뿐이야.
하지만 제이슨이 ‘나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홀로 굳게 결심한다고 해서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될 수는 없다. 제이슨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이 일에 연루된 사람은 엄청나게 많고 투자된 자본은 엄청나다. 제이슨 제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콩클린은 결국 ‘조직의 논리’에 따라 제거당하고, 제이슨은 이제 더 강력한 추격자와 맞서게 된다. “트레드스톤의 작전은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애초에 그것은 고도의 지능 훈련프로그램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훌륭한 기반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 막대한 투자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관련 작전을 철회합니다.” 트레드스톤의 책임자는 국방부에 트레드스톤 작전의 종료를 선언한다. 그러나 트레드스톤의 종언은 곧 더욱더 ‘업그레이드’된 트레드스톤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럼 다른 작전은 준비 됐습니까?” “네, 바로 블랙 브라이어 작전입니다. 국방부와 합작하여 계획된 이 작전은 성공적인 장기 훈련 방법이 될 것입니다.”
제이슨 본이라는 실패작으로 인해 좌절된 트레드스톤은 결국 블랙 브라이어라는 대체제로 바뀐다. 블랙 브라이어 프로젝트는 제이슨의 실패를 통해 ‘오류 가능성’을 대폭 줄인 더욱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인간병기 제작 기획이 될 것이다.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자유롭고 유연한 두뇌를 장착한, 기계-인간을 만들어내는 것. 아마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을, 저마다 사연이 파란만장한 우수한 인재들을 뽑아 그의 원래 삶을 빼앗고 외관상 매우 멋진 비밀요원의 임무를 맡기는 것. 결국 트레드스톤이나 블랙 브라이어나 동시에 한 인간이 가진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제거해 ‘국가장치’의 아이덴티티를 이식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 그들은 언제든 ‘제이슨 2, 제이슨 3’를 만들어낼 것이고 트레드스톤보다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대체제를 만들어 ‘그들이 원하는 세계’의 밑그림을 차곡차곡 완성해나갈 것이다.
트레드스톤으로부터 도피하느라 아직 블랙 브라이어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제이슨은 일단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기로 한다. 내가 무엇이었든, 내가 누구였든, 이제 상관하지 않겠다. 그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진 못했지만 과거의 삶으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 그는 트레드스톤을 가까스로 따돌린 후, 굳이 곳곳의 서류와 증인을 찾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굳이 나를 찾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육체가 이미 나의 과거를 말하고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과 공간이 나의 육체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나를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굴레도 육체지만, 내가 이 삼엄한 권력의 감시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내 육체 위에 나 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이자 희망, ‘내 몸’이라는 최고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길로 떠나기로 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 그녀에게로.
푸코는 생전에 깊은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고, 다만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은 그의 스타일이 지닌 독창성에서 비롯되었는데, 덕분에 『말과 사물』처럼 어려운 저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철학 수업에 관계하는 내 여자 친구 한 명은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사르트르 한 페이지, 레비스트로스 한 페이지, 그리고 푸코 한 페이지를 읽어준다. 그런데 푸코의 페이지를 들을 때만 학생들은 (……) 그의 글쓰기 때문에 깜짝 놀라 침묵 속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그의 강의가 거둔 성공(강의실이 꽉 차서 청중들은 바닥이나 통로에 앉기도 했고, 일부는 다른 강의실에 설치된 화면을 통해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또한 그 강의의 내용보다는 그 스타일에 기인하는 바가 더 컸다.
-풀 벤느, 이상길 역,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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